영주를 지나 성혈사로 가는 길은 온통 가을빛이다. 황금빛 물결이란 말이 실감나게 논은 진노랗색이다. 대구에서 살다보면 이런 들판을 구경하기가 힘드는데 아름답게 펼쳐진다. 은백색의 억새와 함께 바람에 어우러져 화려한 빛을 발한다. 도로 가엔 햇살 좋은 볕에 벼를 말리고 있다. 이른 논엔 볏짚을 가지런하게 쌓아 놓았다. 빈 논은 왠지 주인을 잃은 듯 황량하다.
덕현 마을을 지나 성혈사 가는 길목엔 사과밭 천지다. 탐스럽게 영그러진 선홍빛 사과가 유혹을 한다. 달리는 차안에서 사진 한 컷 찍어 보겠다고 무진 애를 섰으나 자꾸 흔들린다. 손가락으로 톡 치면 통통통 소리가 날 것 같다. 아삭아삭 한 입에 베어 물면 달기가 그만 일 것이다. 예전 부석사 내려오는 길에 사과 한 박스를 사서 질리도록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맛이 일품이었다. 밭에 주인이 없다면 한 개 따고 싶은 충동까지 인다.
선홍빛과 황금빛이 시야를 자극하는 사이 어느 새 성혈사에 도착해 있다. 주차장은 새로 지은 듯하다. 일요일인데 한적하니 좋다. 한 대의 차량이외에는 다른 차량은 보이지 않는다. 소백산 자락이 어서 오라는 손짓하며 우릴 반긴다. 마음이 탁 튀이는 것 같다. 풀냄새와 산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도회에서는 도저히 맡은 수 없는 신선함이 다가선다.
큰 법당에서 잘 생긴 스님이 한 분이 나오면서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보신다. 그냥 나한전 보러 왔다고 하니 잘 구경하고 가라며 너그러운 인사말을 건넨다.
소백산 국망봉 아래 월명봉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성혈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성스런 스님이 나온 굴이 있다 해서 성혈사(聖穴寺)인데, 굴은 절 못 미쳐 왼쪽 물길 건너 잣나무 우거진 궁골 오른쪽 절벽 밑에 뚫려 있다. 입구는 좁으나 안에는 20여명이 들어앉을 수 있다.
오후의 햇살이 나한전을 비추고 있다. 나한전을 보자 아름다운 꽃살문에 넋을 잃고 말았다.
1985년 보물 제 832호로 지정된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한 건축이며 맞배지붕이다. 나한전의 꽃살문은 가운데 어간 2쪽, 좌우 2쪽씩 모두 6쪽으로 된 문이다. 좌우의 모란 꽃살문은 그런대로 단청이 좀 남아 붉은 빛을 띄고 있다. 가운데 어간 꽃살문은 단청이 많이 벗겨졌지만 그 정교하고 섬세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간 문살 전체는 연못으로 연꽃과 연잎으로 채우고 나서 여백에다 개구리, 물새, 두루미, 물고기, 동자승 등을 새겼다. 연잎 위에서 노니고 있는 동자승이 너무나 귀엽고 앙증맞아 보인다. 안내문 읽어 가며 어간 하나하나 무슨 모양인지 찾는 재미 또한 솔깃하다. 물고기는 맨 아래에 보인다. 가을 햇살이 사진 찍는 것을 심술궂게 훼방 놓는다.
나한전 앞에는 두개의 석등이 서 있는데 거북이 등에 한 쌍의 용이 뒤엉켜 올라가는 모습으로 특이하다. 뒤엉켜 있는 모습이 다른 석등과 달라서 그런지 섬뜩하다는 생각이 든다.
임란왜란 이후 중건 된 이 건물은 다포식 건물로 나한전 안에 들어서니 천정도 바닥도 퇴색된 느낌이다. 비로자나 좌상을 중심으로 석가의 뛰어난 제자였던 16나한이 모셔져 있다. 나한전 앞의 가을볕이 너무나 탐스러워 마냥 앉아 있고 만 싶다. 극락이 따로 없는 듯, 이 곳인 것 같다.
일요일날 번잡함을 피해 간 성혈사의 가을날은 조용하게 가을을 느끼고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내년 이맘때쯤, 다시 한 번 이 곳을 찾으면 마음속 번뇌가 없어지려는지. 돌아오는 길엔 가을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