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폴레간드로스 섬
그리스에 있는 흰 건물들은 어떻게 저렇게 하얗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얗다.
어딜 가나 5성급 호텔 이불처럼 깨끗한 건물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빛나고 있다. 아마 이곳 사람들은 비수기에 꽃단장을 하느라 바쁠 것이다. 다음 여름에도 예쁜 낯으로 사람들을 맞이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페인트 칠을 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선하다.
또, 그리스에 있는 파란색 건물도 어떻게 저렇게 파랗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파랗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딱 정석적인 파란색. 그 색은 그리스 바다와 닮아있다.
깎아지른 언덕에 빼곡한 흰 건물과 파란 돔, 그 사이 피어난 빨간 부카델리아 꽃, 투박한 패턴의 돌바닥,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포카리스웨트스러운 이미지의 주인공.
그곳은 바로 산토리니 섬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곳에서 아름다움의 이면을 보았다.
관광객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좁은 골목길을 줄 지어 지나가야 했고, 사진이 잘 나오는 구간에서는 어깨를 부딪치며 밀고 나가야 겨우 한 발짝 옮길 수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들어간 기념품 가게에도 사람들로 그득그득 차 있었다.
생수통을 어깨에 짊어진 현지인이 그리스어로 목청껏 소리 지르며 지나갔고 피곤한 부모는 말 안 듣는 아이를 세워두고 호통쳤다.
겨우 사람들을 뚫고 유명한 레스토랑에 찾아갔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큰 실망을 했다.
서버가 불친절했다(백인 테이블에서 빵끗빵끗 웃는 걸 보니 인종차별 냄새가 풀풀 풍겼다).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했는데, 질기고 뻣뻣한 고기 한 덩어리와 감자튀김 한 무더기가 왔다. 그마저도 25유로였다.
또, 마을에 계단이 어찌나 많은지. 10kg 배낭을 메고 나귀처럼 오르내리다가 그만 쓰러질 뻔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옥이 있다면 아마 이아마을일지도 모르겠다.
그 마을을 벗어나자 드디어 해방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는 원래 산토리니 섬을 떠나 미코노스 섬에 갈 계획이었다. 파티의 섬이라고도 불릴 만큼 떠들썩한 곳이라고 들었다. 해변에서 밤마다 EDM 음악이 울려 퍼지고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 하나가 되는 섬.
한국에서는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산토리니를 겪은 뒤로 관광객들이 많은 곳은 쳐다도 보기 싫어졌다.
그래서 노선을 변경했다. 다행히 미코노스행 페리 티켓을 사두지 않았고 예약한 호스텔은 취소가 가능했다.
나는 숨겨진 섬을 찾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노트에 써 내려간 내 조건은 이렇다.
1. 산토리니 섬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
- 3일 뒤 타야 하는 프랑스행 비행기를 놓칠까 염려되기 때문.
2. 검색했을 때, 정보가 없을 것.
- 한국인들이 아는 곳은 이미 유명한 곳들 뿐이다.
3. 섬에 호스텔이 없을 것.
- 호스텔이 있다는 건 관광객이 많다는 뜻.
4. 부킹닷컴에 뜨는 숙소가 30개 미만일 것.
- 작고 조용한 섬이라는 증거.
일단 구글맵을 뒤져보았다. 그리스 섬은 면적 기준에 따라 많게는 6,000개나 있다. 그중 사람이 거주하는 섬만 추려도 200여 개. 산토리니 근처만 해도 크고 작은 섬이 여러 개 보였다.
나는 페리를 타고 갈 계획이었으므로 산토리니 아티 니오스 항구로부터 이어진 실선을 따라가 보았다. 구글맵을 확대해 보면 섬과 섬 사이 항로를 뜻하는 실선이 있다. 여기저기 따라가다 눈에 띄는 이름을 하나 발견했다.
산토리니 섬에서 북서쪽 방향에 있는 ‘폴레 간드로스(Folegandros)’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특이한 이름이었다. 그 섬을 후보로 등록하고 조건을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산토리니 섬에서부터 떨어진 거리 - 64km 통과.
네이버 검색 결과 (2022.09.08 기준) ‘그리스에서 방문해야 할 알려지지 않은 장소 10곳’이라는 제목의 블로그 게시물 하나와 이드라 섬에 다녀왔다는 블로거가 짧게 언급한 부분이 있었고 나머지는 보트 침몰 사고에 관한 기사. 이 정도면 통과.
마지막으로 부킹닷컴 검색 결과 호스텔이 단 한 개도 없었고 숙소가 18개뿐이었다. 통과.
나는 산토리니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폴레간드로스 섬으로 가는 페리 티켓을 끊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2005년, 세계적인 미국의 여행 잡지인 콩데나스 트레블러(Conde Nast Traveller)는 폴레간드로스섬을 ‘그리스에서 숨겨진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소개했다. ‘때 묻지 않은 진정한 그리스의 모습’, ‘평화로운 섬’이라 불리어진다. 마을도 단지 3개뿐이고 아직도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소박한 자연 속에서 은근한 매력을 찾고, 내면의 고요한 울림을 들으려는 진정한 여행자라면 폴레간드로스 섬으로 향하라.’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구글에서 찾은 정보다. 나귀를 볼 수 있다는 말과 내면의 고요한 울림이라는 대목도 마음을 움직였지만, 그중 가장 좋았던 부분은 ‘숨겨진’이라는 단어였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기분은 말로 설명 못한다. 설렘과 두려움이 정확한 비율로 섞여 오묘한 기분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 기분을 섬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느끼고 싶었으나, 폴레간드로스 행 Sea Jets 페리에 타자마자 흥이 깨져버렸다. 분명 어디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라고 했는데, 제법 큰 페리에 외국인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새 유명해졌나?
티켓에 좌석 번호가 없어서 중간쯤 아무 데나 앉았다. 배낭을 내려두고 한숨 돌리는데, 옆자리에 30대 외국인 남자가 앉았다(사실 20대일지도 모른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월레스와 그로밋'에 나오는 주인 월레스를 닮았고,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 있었다. 술에 취했는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보아하니 뒷자리에 쭉 앉은 다른 남자들과 일행인 듯했다. 그들은 프랑스어로 대화했다.
“너, 프랑스 갔다 왔어?”
나를 힐끔힐끔 보던 그가 내게 슬쩍 말을 걸었다. 내 배낭에 붙여둔 프랑스 국기 패치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응, 2년 전에 한 번.”
좌석에 삐딱하게 앉은 모습이나 폴폴 풍기는 술냄새나 헐렁한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뒤에 앉은 그의 일행이 이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 게 느껴졌기 때문에 말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프랑스어를 못 하니까 그들이 속닥거리는 걸 알아들을 수 없어 언짢았다.
“여기 붙어있는 나라 다 가봤어?”
“응.”
“와우, 엄청나네. 혼자 여행 다니는 거야?”
“응.”
잠시 대화가 끊겼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또 말을 걸었다.
“지금은 어디로 가?”
어디라니? 그의 질문으로 나는 그제야 이 페리에 탄 모든 사람들이 다 폴레간드로스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페리는 산토리니에서 출발해 여러 섬 중 하나인 폴레간드로스에 잠시 정박했다가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로 간다.
“폴레간드로스 섬에서 내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왓?!이라고 되물었다.
“나도 지금 폴레간드로스에 가는 중이야! 그 섬을 어떻게 알았어?”
“어? 아... 유명하지 않은 섬에 가고 싶어서 찾아봤어.”
“정말 좋은 선택이야!”
그가 조금은 언성을 높이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말했다.
“나는 그리스 섬을 좋아해서 엄청 많은 섬을 다 가봤는데, 그중 폴레간드로스 섬을 가장 좋아해. 이번에는 며칠 후에 내 친척이 거기서 결혼식을 해서 가는 건데, 벌써 7번 째야. 근데 아직도 설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섬이거든.”
프랑스인들은 대부분 혼자만 알고 있는 여행지가 있다. 전 세계에 한 곳쯤은 자신의 아지트로 삼고 이런 순간에 명함처럼 내미는 것이다. 그가 폴레간드로스라는 명함을 내밀 때 눈빛이 반짝거렸으므로 두려움보다 기대감이 한 발 앞섰다.
1시간 30분 뒤. 폴레간드로스 섬에 도착했다.
그 많던 사람 중에 폴레간드로스에서 내린 사람은 결혼식에 가기 위해 온 프랑스인 무리와 나밖에 없었다. 이곳 항구는 항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았다. 낚싯배와 요트 3대가 바다에 둥둥 떠 있었고 공터에 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것 말고는 딱히 뭐가 없다.
등대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3m쯤 되는 소형 등대에 ‘Folegandros Welcome’이라 적힌 파란 간판이 끝. 그렇게 투박한 환영 문구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생각보다 더 작은 규모에 놀라는 동안 프랑스인 무리가 호텔에서 픽업하러 온 봉고차를 타고 갔고, 나만 항구에 남겨졌다.
나는 숙소가 있는 마을로 가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정보가 없어 찾는 건 내 몫이었다. 항구 앞에 있는 흰 그리스식 건물 옆에 버스정류장으로 보이는 벤치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시간표도, 목적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결국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항구 사람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코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기서 버스를 타면 돼요. 10분에 한 번씩 올 거예요.”
그들은 폴레간드로스 환영 간판만큼이나 투박한 뱃사람으로 보였지만, 아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수더분하게 웃는 얼굴이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그 흔한 호객꾼 하나 없는 항구에 덩그러니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거운 엔진소리와 함께 버스 한 대가 등장했다.
이곳에는 목적지를 적어둘 필요가 없었다. 버스가 향하는 곳은 단 하나. ‘코라’라고 불리는 마을뿐이다.
버스기사에게 2유로를 지불하고 좌석에 앉았다. 80년 대 자료 화면에 나올 법한 낡은 버스였다. 기하학무늬 패턴의 벨벳 좌석은 아주 오랫동안 흙먼지를 빨아들인 듯했다. 하지만 더러운 시트 따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창 밖 풍경에 정신이 팔렸다.
나를 태운 버스가 산 등성이 사이에 난 도로를 홀연히 지나갔다. 산은 버스를 집어삼킬 듯 높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나무는 단 한 그루도 없었다. 푸른 숲으로 우거진 한국의 산과 정반대다.
투박한 바위가 초코바 속 아몬드처럼 쿡쿡 박혀있었고, 지중해 초목이라고 불리는 마른 식물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척박한 풍경에 매료되어 멍하니 구경하기도 잠시 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코라에 도착했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프랑스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지상낙원이구나.
숙소를 찾는 동안 코라 마을 전체를 한 바퀴 빙 둘러 걸었다.
하얀 건물 골목을 지나면 번화가가 나온다. 타베르나가 모여 광장을 이루고 있다. 아주 작은 광장이라 각각의 타베르나 사이 경계가 모호한데, 의자 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빨간 의자는 카페, 노란 의자는 해산물 레스토랑, 이런 식이다.
중앙에 라우루스 노빌리스라 불리는 덩굴나무가 커다란 지붕을 만들어 광장에 내리쬐는 햇살을 막아주었다. 자연으로 만든 지붕을 보며 감탄했다. 마치 요정이 나오는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용한 오후, 섬사람들은 테이블에 앉아 그리스식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들은 하루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는 듯 배낭을 메고 기웃거리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커피를 아주 조금씩 홀짝이며 나를 응시한다.
꿈을 꾸는 듯했다. 색색깔 의자 사이를 걸어 다니는 고양이가 내게로 와 말을 걸 것 같았다. 어디서 왔니? 그럼 나는 저 먼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저 좁은 골목으로 유유히 걸어 나간다. 머릿속에 그런 영상이 재생됐다.
이 섬을 통째로 빌려 영화 한 편을 찍는다면 그 내용이 어떻든 간에 미술 부분 작품상을 탈게 분명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영화의 제목을 폴레간드로스라고 기억하겠지.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쉬다 어두워질 때쯤 다시 마을 중앙으로 갔다.
주황색 조명이 켜진 코라 광장은 또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나무 하나하나 정성스레 휘감아둔 줄 조명이 차르르 빛났다.
먼저 온 프랑스인 무리가 그 빛에 취해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벌게진 얼굴들은 높고 낮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말했다. 그 웅성거림이 배경음악 되어 이 순간을 채웠다.
나는 구석에 있는 술집 야외 좌석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여행 중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이런 순간이다. 내가 발견한 섬이 미치도록 아름답다는 것을 확인한 뒤 들이키는 시원한 라거 맥주. 그 전율을 들이켠 내게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이 섬의 구석구석 전부 다 가봐야지. 내게 주어진 3일을 남김없이 먹어치울 거야.
다음 날 아침, 나는 크나큰 결심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 프라이빗 요트라도 빌리려 그러나 싶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이틀 동안 Quad(사륜구동 ATV)을 빌리기로 한 정도.
이 작은 섬에도 버스는 있다. 그러나 알가리 해변과 항구로 가는 버스 밖에 없었다. 오토바이나 차를 렌트하자니 너무 위험했다. 장롱면허인 내게 유일한 선택지가 바로 Quad이다. 나는 전날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봐뒀던 Donkey Scooters를 찾아갔다.
코라 마을에서 항구 쪽으로 가는 길, 도로에 작은 사무소가 하나 있다.
이런 렌탈샵에 온 게 처음인지라 한참 동안 잡상인처럼 기웃거렸다. 건물 뒤편으로 가서 헬로우…?라고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카랑카랑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어떤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 리넨 점프슈트를 입고 풍성한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사륜구동 바이크를 타고!
그녀는 등장만으로 내 마음을 빼앗았다. 건물 옆에 바이크를 세우더니 익숙한 손짓으로 시동을 끄고 내렸다. 구릿빛 피부와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 웃을 때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얼굴은 타일라가 떠오르는데, 행색은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다,
“너 몇 살이야? 미성년자는 아니지?”
“나 23살이야. 운전면허증도 있어.”
그녀는 나를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러더니 면허증부터 확인했다.
이제 슬슬 어려 보인다는 말이 기분 좋아지는 나이인지라 웃으며 23살이라 말했지만, 그녀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에게 6살 아들이 있다는 말에 내가 더 놀랐다. 작은 체구와 곱슬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큼함 덕에 아들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녀는 혼자 빌리는 것 맞냐며 재차 확인한 뒤, 바이크를 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
“오, 정말? 나 먹방 엄청 많이 봐. 햄지! 햄지가 내 최애야.”
“뭐? 햄지를 어떻게 아는 거야?”
먹방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 작은 섬까지 한국 유튜버가 영향을 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몰 토크를 이어가며 대여료 50유로를 결제했다. 그녀는 최근에 들여온 가장 안전한 놈으로 빌려줄 테니 걱정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헬멧을 고르고 잠시 기다리자 밖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나와 이틀 동안 함께 할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쨍한 주황색, 검은색 바퀴…. 심장이 두근댈 만큼 멋진 녀석이었다. 그래, 해보자. 천천히 달리면 돼. 죽기야 하겠어. 바이크에 올라타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남편에게 짧은 강습을 받은 뒤 출발했다. 동키 스쿠터 가족들이 밖으로 나와 첫 발걸음을 떼는 나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전화하라고 소리쳤다. 이제와 생각해 보건대, 어쩌면 나보다 그들이 더 불안해했던 것 같다.
나는 멋모르고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며 폴레간드로스의 세계로 도약했다.
사고가 있었나? 물론이다.
그 멋진 녀석과 함께 하는 동안 두 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첫 번째 고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나는 엄지 손가락으로 버튼만 누르면 씽씽 달리는 녀석에 신나 버렸고, 해안도로를 막 달렸다. 푸른 지중해가 내 옆으로 이어졌다. 투박한 산이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었다. 마치 하늘을 달리는 듯한 기분에 푹 빠져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섬의 끝자락에서 잠시 시동을 껐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시동을 켜려는데, 녀석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강습을 받을 때 무조건 P 기어를 둔 상태에서 시동을 끄라 배웠건만, 그새 까먹은 내가 중립 기어에 두고 시동을 꺼버린 것이다. 아무리 흔들고 기어를 당겨봐도 녀석은 꿈쩍도 안 했다. 설상가상 그곳은 전파도 터지지 않는 곳이었다. 상황 파악이 끝나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 고립됐구나!
한 시간 동안 시동을 건다고 고군분투했고, 30분 동안 SOS 전화를 걸기 위해 근처를 떠돌았다. 주변엔 나귀를 타고 밭을 일구는 농부 밖에 없었다. 녀석을 주차한 곳에서 10분쯤 걸었을까, 기적적으로 전파가 잡혔고,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동키 스쿠터 식구 한 명이 나를 구해주러 왔다. 그는 도착한 지 3초 만에 녀석을 깨웠다(1시간 반 동안 발만 동동 구른 게 머쓱해졌다). 짧은 강습을 한 차례 더 받은 후에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 고비는 그야말로 죽을 뻔했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오프로드를 달리다가 샛길로 잘못 빠져 길이 막혀버렸다. 바이크를 돌려야 하는데, 길은 오르막이었고, 아주 좁았다. 몇 센티만 더 가도 바로 낭떠러지로 행이었다.
패닉 상태에 빠졌다. 숨이 거칠어졌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아주 천천히 수십 번 시도한 뒤에야 바이크를 돌릴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그 길에서 어떻게 녀석을 돌렸는지 모르겠다. 만약 거기서 굴러 떨어졌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아직도 전율이 돋는다. 그러나 내 인생의 결말이 ‘그리스 폴레간드로스섬에서 바이크를 타다가 죽었다’라면 나쁘지 않다. 델마와 루이스 같고 멋지지 않나.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가 되도록 녀석과 함께 폴레간드로스 섬을 탐험했다.
해안 도로를 따라가다가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전통 음식을 먹어보고(토끼고기와 파스타 면인데, 맛없었다) 작은 해변에서 친해진 이탈리안 소녀와 함께 수영을 하며 놀았다.
섬은 아주 작았다. 1시간이면 섬 머리에서 출발해 꼬리까지 갈 수 있다. 코라 마을 말고도 작은 마을이 2개 더 있다. 사실 마을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짓다 만 서머하우스가 즐비해 있거나 현지인이 사는 소박한 집 몇 개가 모여있는 정도다.
그런 마을을 지나갈 때면 왠지 창피해졌다. 한 번은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큰 엔진 소리를 내며 지나가다 마당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 나 같은 외래종이 이 섬의 조용한 오후를 망치는구나 싶어 그 일대를 피해 해안도로로 노선을 틀었다.
시원하게 펼쳐진 도로를 신나게 달리다 보니 작은 농가와 척박한 땅이 있었다.
그 길 공터에 바이크를 주차해 두었다. 다른 차나 스쿠터, 바이크 몇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부터는 바퀴 달린 것들이 못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비치타월과, 물, 슈퍼마켓에서 산 자두 두 개가 든 배낭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다. 하루종일 들리던 엔진소리가 사라지고, 새소리가 들렸다.
아, 조용하다.
나는 나와 대화하며 걸었다.
세상이 조용해지니까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안경을 잃어버려 멀리 볼 수 없게 되자 거울 속 내 얼굴에 난 주근깨만 세어보는 격이었다.
깊은 곳 어딘가에 숨어있던 과거의 순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 나는 자연을 좋아해. 나는 어쩌다 자연을 좋아하게 됐을까? 해묵은 기억을 더듬어 아빠 등에 업혀 내려오던 산길을 떠올려 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캠핑에 가거나 등산을 했다. 나와 언니는 번갈아가며 아빠 등에 업히곤 했다. 겨울 산속 냉기와 따듯했던 아빠 등의 온도를 가늠해 보았다. 그런 추억들이 쌓여서 내가 되었구나, 이런 성찰의 대화였다.
40분쯤 걸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무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돌길을 내리 걷느라 덥고 지쳐 그만 돌아가려던 찰나 저 멀리 바다의 수평선이 보였다.
좀 더 걷자 바다로 뻗어진 거대한 능선이 나왔다.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친구와 재회하듯 저 수평선을 향해 달렸다. 끝까지 달려가면 바다에 빠질 것 같이 깎아지른 산길이었다. 하지만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이대로 당장 죽어버린다 해도 이 땅에 미련 따위는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능선의 끝에 서서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음미했다. 해초향 서린 바람이 땀을 식혀주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능선 밑에 절벽으로 둘러 쌓인 해변이 하나 있었다. 나는 거친 바위 산을 지나 그 해변으로 갔다.
해변에 도착할 때쯤, 그곳이 누드 비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상 그리스 섬 해변에서 사람들의 알몸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좋-은 정보를 알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다. 그냥, 누드비치구나. 사람이 벗었구나 정도다. 대중목욕탕으로 단련되어 그런가.
여기서는 벗어도 되고 저기서는 안 돼요 라는 표지판 따윈 없지만 암묵적인 룰은 존재하는 듯하다. 타베르나가 즐비해 있는 번화가 근처 해변에서는 모두가 수영복을 잘 챙겨 입고 다닌다. 그러다가 이렇게 숨겨져 있는 작은 해변에 오면 다들 노출증에 걸린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다 해도 벗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밌는 점은 그 작은 해변에서도 구역이 나뉜다는 것이다. 해변의 오른편에는 아이들과 휴가를 즐기러 온 가족들이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즐긴다. 타탄체크무늬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 샌드위치와 함께 맥주를 마셨다.
왼편으로 쭉 걸어오자 여자들이 유려한 가슴을 드러내고 바위 위에 앉아 일광욕을 즐겼다. 그들의 몸은 건강하게 그을려 있어 그리스 바다와 어울리는 색이었다. 나는 해안가를 천천히 걷다가 왼편에 자리 잡기로 마음먹었다. 어쩌자고 그랬는지 참.
해변은 모래 이불을 덮고 누워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파도를 나른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해가 수평선을 향해 슬금슬금 기어 내려오는 오후 5시, 9월의 그리스 해변에서 달뜬 표정으로 불안해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자, 일단 마음이 부르는 대로 벗은 사람들만 모여있는 왼편으로 왔다. 커다란 바위 근처 그늘을 찾아 배낭을 내려놨고, 고른 바닥에 비치타월을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흘끔 주변을 살펴보니 벗고 있는 사람이나 입고 있는 사람이나 전부 똑같이 여유로워 보였다. 나만 혼자 이쪽저쪽 눈치 보는 중이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다가 이래서야 여기에 온 보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이 해변에 오기까지 얼마나 멀고도 험했나.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것을 마음껏 누리자.
입고 있던 민소매 티를 벗었다. 반바지도 벗었다. 망설이는 티가 나면 초짜인 게 들킬까 봐 재빨리 벗었다. 그 와중에 팬티는 차마 벗을 수가 없어 그대로 바다를 향해 걸었다.
대각선 방향에 있는 외국인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동양인 가슴이 신기한가). 뭐, 가슴을 내놓은 것도 자유, 보는 것도 자유 아니겠어. 이 두 덩어리는 그저 먼 미래에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는 신체 기관일 뿐이야 라는 생각을 하며 차가운 바다에 발을 담갔다.
원래 같으면 천천히 물을 묻혀가며 들어가지만 (사실 상당히 부끄러웠으므로) 냅다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차가웠다.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쳐갔다. 파도가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느낌이 이상했다. 물결 따라 가슴이 일렁거렸다.
바다가 목까지 차오른 지점에서 온몸에 힘을 풀고 누웠다.
파문이 귓가를 간지럽히다 쑤욱, 귓속을 들락거렸다. 서늘한 감촉과 일렁이는 물결에 집중하며 하늘에 뜬 구름을 쳐다보았다,
나는 문득 이 섬과 내가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이 바다는 나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줄 양수고, 나는 비릿한 탯줄이 이어진 신생아다.
마치 포르말린에 들어가 있는 개구리 표본처럼 미동도 없이 바다를 유영하는 동안 이 짜디 짠 바닷물을 빨아들이며 성장했다. 염분 농도, 파도 세기, 바다 색, 온도, 나를 비추는 햇빛의 양까지 다 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상상했다.
저 멀리 산 위를 훑으며 지나가는 바람의 혼잣말 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후우우웅 하며 뭔가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소리라서 스치는 인사보다는 아주 긴 독백에 가까웠다. 어쩌면 바람이 자유롭게 춤을 추어 나는 발자국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람의 언어를 모르니까.
갑자기 아주 확실한 직감이 들었다. 먼 훗날 내가 이 순간을 아주, 아주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확신. 그것은 마치 맨 정신에 꾼 예지몽 같았다. 내가 엿본 미래의 조각이 흐물흐물한 해초가 되어 내 옆으로 둥둥 떠다녔다. 그러자 1분 1초 지나가는 현재가 마치 그리운 과거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날 비로소 ‘자유롭다’라는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깊고 강하게 새겨졌다.
내가 폴레간드로스에서 최고의 날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힘의 이름이 용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아니었다.
최고의 섬을 발견하고자 하는 목표가 미지의 섬으로 가는 티켓을 사게 했고, 이 섬을 전부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바이크 녀석을 만나게 해 주었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누드비치에서 내 속옷 끈을 풀게 했다.
용기는 그저 겉 껍데기에 덕지덕지 들러붙어있을 뿐이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팔팔 끓고 있는 열정이 있다. 그걸 알게 되면 더 이상 용기라는 거대한 이름에 속지 않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여행의 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날의 의미들을 낚아채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길고도 짧았던 3일이 지나고 폴레간드로스 섬을 떠나는 배를 탔다.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를 미리 예매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한 달 동안 이 섬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이 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멀어지는 폴레간드로스 섬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기준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고귀함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폴레간드로스 섬이 그저 척박하고 지루하고 조그마한 섬일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의 폴레간드로스 섬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그 누구도 ‘내’ 눈으로는 못 본다. 나만이 볼 수 있다. 그 섬에서 내가 느낀 희열은 얼마나 유일한 것인가. 그런 생각에 빠지다 보면 결국 간접적인 경험만 선사하는 이 글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감히 말하고 싶다.
폴레간드로스 섬으로 가세요. 그곳에서 당신의 눈으로 보고 당신의 심장이 얼마나 뛰는지 느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