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아르테미다
2020년, 코로나가 터졌다. 역마살이 쎄게 낀 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어찌어찌 일을 하며 살다가 어디든 좋으니 서울을 떠나고 싶어 혼자 제주도로 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오피스텔 계약을 하고, 노형동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제주살이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때 나는 혼자 살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다. 혼자 자는 것도 무서워하면서 제주도에서 자취를 한다고? 뭐든 생각한 걸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라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제주도에 있는 동안 자연스레 밤낮이 바뀌었다. 길고 긴 새벽을 버티기엔 마음도 풍족하지 않았다.
글을 써보려 했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어 끝까지 못 쓰고 쳐 박아두길 반복했다. 낭만으로 가득 찬 줄 알았던 제주도가 점점 외딴섬이 되어갔다. 오피스텔 계약은 1년이었지만, 9개월 만에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가 내 나이 23살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
부모님 품으로 돌아와 제주 바람에 깎인 살점에 새살이 돋을 때까지 푹 쉬었다. 가벼운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온 시점이라 치료에 집중하며 지냈다. 그때도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회복되고 난 뒤 글을 제대로 배울 생각으로 서울예대 극작과 입시에 도전했다. 9개월 동안 글에만 매달린 채 살았다. 결과는 또 실패였다! 아픈 기억이라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
그때 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에 위로받았다. 원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차로엔 신호등이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제 내가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왕 가는 거 멀리멀리 떠나기로 결심했다. 제주도보다 더 멀리.
그리스에 가고 싶었다.
그리스 국기를 보면 왠지 모르게 설렜다. 푸른 지중해로 가서 그동안의 고생을 싹 씻어 내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선 또 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번엔 6개월 동안 돈 버는 것에만 매달렸다.
처음 세 달은 반려동물 수제 간식점에서 일했다. 하루에 8시간 동안 흑염소 뿔을 다듬고, 돼지 안심을 손질하고, 소떡심을 끓이고 불려 지방을 긁어냈다. 그 매장은 주문량이 폭주해서 큰 공장으로 이전했다. 직원 제의를 받았지만, 지방까지 내려가서 건조기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새로 이전한 일자리는 삼성역 근처에 있는 다이닝(이고 싶은) 레스토랑이었다. 돈을 더 바짝 벌기 위해 오후 4시부터 새벽 2시까지 일했다.
그 레스토랑은 이상한 곳이었다.
오픈하자마자 주차타워에서 일하던 발렛기사님이 죽는 사고가 있었다. 레스토랑 대표는 그 뒤로 정기적으로 무당을 데려와 굿판을 벌였다. 밑에 층에서 손님들이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데, 바로 위층에서 무당이 쌀 뿌리며 굿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기괴함 그 자체였다. 그 굿판을 구경하다 뭐에 씐 건지, 레스토랑을 그만둘 무렵 공황장애가 심해졌다.
레스토랑 일을 하며 가장 서러웠던 점은 남들 다 배가 터지도록 먹는 시간에 굶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하게 배가 고픈 날에는 누군가가 먹다 남긴 스테이크 조각을 주워 먹기도 했다. 더럽게 맛있는데 기분이 참 더러웠다. 그 덕에 노예 생활도 대감집에서 하라는 말을 완벽히 이해하긴 했다. 거지처럼 꽃등심 스테이크를 집어먹는 꼴이란, 참.
어떤 날에는 술에 거하게 취한 아저씨들이 와서 내가 들고 있던 트레이에 성매매 전단지를 턱 올려두며 팁이라 낄낄 거렸고, 또 어떤 날에는 혼자 6인 테이블을 정리하다 손목에 금이가 깁스를 하고도 접시를 날라야 했다. 너무 힘든 날엔 집으로 돌아와 내 강아지 하루를 끌어안고 울었다.
아무튼 6개월 동안 1,000만 원을 모았다.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일주일 뒤(그 레스토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폐업했다), 그리스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뜨고 멀어지는 한국땅을 보자 눈물이 났다. 지난 3년 간 이곳저곳에서 고군분투했던 내 모습이 보였다. 자, 이제 행복하자.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걸 하는 거야. 그리스 땅을 밟기 전까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난 보상심리를 그득그득 싸들고 그리스로 향했다.
9월 초, 오전 9시 30분경 그리스 아테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아부다비 공항에서 10시간 동안 체류했기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몽롱한 상태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몇 시간 전까지 어딘가 쿠쿠무리한 중동에 있었는데, 갑자기 지중해의 햇살을 맞는 기분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리스는 내가 가봤던 서유럽과 확연히 달랐다.
도로에 가득 찬 오토바이와 노란 택시가 내는 소음으로 어지러웠고, 그 배경에 깔린 야자수 나무와 주황 지붕 건물들이 동남아 휴양지 같았다. 이게 발칸반도의 매력인가? 햇살이 주는 너른 한 분위기 속, 시끄러운 사람들과 동시대에 우후죽순 지어진 거친 건물들.
공항버스를 타고 도시 중앙에 내려 택시로 갈아탔다. 가장 싼 호스텔을 찾아가는 길은 멀었다. 교통체증을 뚫고 갔더니만 호스텔에 간판도 없어 한참 헤맸다. 결국 부킹닷컴에 기재된 번호로 전화를 하고 나서야 호스텔을 찾을 수 있었다.
‘파그레이션 유스 호스텔’에 도착했다.
나는 이곳에서 하루동안 숙박했다. 1박에 무려 12유로. 이런 가격은 정말 보기 힘들다.
신기했던 건 그 건물에 들어선 순간, 노스탤지어가 느껴졌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개포동 아파트에 잠깐 살았다. 그 아파트 상가에는 달고나 기계나 탱탱볼, 3원색 훌라후프 등이 있는 문구점이 있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그 문구점에 가서 불량식품을 사먹곤 했다.
그곳에는 어딘가 모르게 퀴퀴하고 차가운 기운이 있었다. 조명을 달아도 늘 어두웠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도 노후화된 아파트였다. 성인이 되어 다시 가본 그곳엔 뻔쩍 뻔쩍한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호스텔 복도를 걸어가며 그때 그 아파트 문구점에서 느꼈던 희미한 감각이 되살아남을 느꼈다.
축축한 공기, 곰팡이 냄새, 찹찹 감기는 바닥.
개포동과 아테네를 연결 지을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를 주인장도 알고 있는지 곳곳에 푸른 식물을 배치해 두었다. 그 푸릇함이 우중충한 느낌을 희석시켰다. 벽에 붙여둔 전 세계 지폐나 수십 개의 압정이 박힌 세계지도가 자유로운 배낭 여행객을 위한 휴식처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문제는 샤워 시설이었다.
그곳에서 따듯한 샤워를 하려면 여러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먼저 샤워를 하기 10분 전 보일러 버튼을 누른다. 빨간불이 들어오면 그때부터 샤워를 시작한다. 따듯한 물이 나오는 제한 시간은 단 5분. 서둘러 씻으면 가능한 시간이지만 샤워기도 말썽이다. 동그란 버튼을 꾹 눌러야 물이 나온다. 얄궂게도 물이 4-5초 만에 끊긴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 손으로 바쁘게 샴푸질을 하는 동안 등으로 버튼을 눌러 겨우 씻었다. 그렇게 했는 데도 5분 시간제한이 끝나 냉수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여기 또 다른 문제.
밤이 되자 ‘가라오케 나이트’가 시작됐다. 캔맥주를 든 투숙객들이 좁디좁은 소파방에 모여 노래를 불렀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양한 국적이 모인 곳에서 노래를 부르면 꼭 John Denver의 ’Take Me Home, Country Road’가 빠지지 않는다. 나라면 만국공통 노래로 비틀스의 ‘Hey Jude’나 오아시스의 ‘Wonderwall’을 뽑을 것 같은데 늘 Country Road다(결국 미국으로 통한다 이건가).
그 노래가 나왔다 하면 국적이나 나이 상관없이 전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좌우로 몸을 흔들며 떼창을 한다. 못 믿겠다면 여행지에서 한 번 선곡 해보길 바란다. 분명 반응이 뜨거울 것이다.
하여튼 새벽 2시까지 달리는 컨트리 로드 때문에 잠을 설쳤다.
다음 날, 동트기 전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나는 그리스 여행을 무척이나 고대했기 때문에 미리 계획을 짜두었다.
1일 - 아테네 도착, 시내 둘러보고 밥 먹고 쉬기.
2일 - 아침 7시 항구에서 페리 타고 산토리니 섬으로 이동, 선셋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
3일- 산토리니 섬 투어.
4일- 미코노스 섬으로 이동. 해변 파티.
5일-6일 미코노스 섬 요트투어 등 휴가 즐기기.
7일- 아침 일찍 아테네로 돌아와 저녁 비행기 타고 프랑스로.
(J여러분 미안합니다, 이것도 계획이라 해서…)
철두철미한 계획은 아니었지만, 페리 티켓, 숙소,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까지 미리 결제를 해두었다. 그래서 '아, 너무 피곤하네, 산토리니는 내일 가야지'가 불가능했다.
한국을 떠난 뒤로 3일 동안 쪽잠을 잔 탓에 눈꺼풀이 저절로 감길 정도로 피곤했다,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하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여행만큼은 미리 그려둔 스케치 대로 완벽한 색을 칠하고 싶었다. 그런 내 의지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깜깜한 새벽, 택시를 타고 피레우스(Piaeus) 항구로 갔다.
나는 호옥시나 배를 잘못 탈까 싶어 출항시간 1시간 전에 도착했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해변에서 맡을 수 있는 가벼운 바닷바람 냄새가 아닌 비릿하고 무거운 항구 냄새가 느껴졌다.
티켓판매소 앞에 드문드문 줄을 선 관광객들은 마치 인력사무소 앞에서 기다리는 일꾼들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손에 캐리어가 쥐어져있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어디 팔려가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잠이 덜 깬 관광객들에게 설렘은 없다.
무사히 티켓을 받고 내가 탈 페리도 금방 찾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거대하고 튼튼한 배였다. 배는 선상 부분엔 흰 페인트, 하부엔 파란 페인트로 칠해져 그리스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커다란 글씨로 ’Blue Star Ferries’라 적혀 있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근사한 배의 자태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거진 세 번째로 배에 올랐다. 티켓 검사를 하자마자 뛰어가다시피 갑판으로 나갔다.
내가 굳이 7시간이나 걸리는 페리를 선택했던 이유는 지중해 바닷바람을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토리니로 가는 가장 낭만적인 방법이랄까.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조금 쌀쌀했지만, 갑판 위 야외 좌석 중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제 30분 뒤, 나는 명쾌한 기적소리와 함께 푸른 바다를 건너 산토리니에 갈 것이다.
그러나 내 계획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티켓에 적힌 출항 시간은 오전 7시 20분이었다. 그러나 8시가 되고 나서도 배는 출발할 생각을 안 했다. 안내 방송이 나왔지만, 그리스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영문도 모른 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전 9시, 항구에 있는 선원들이 출항 준비를 했다. 그들은 항구와 배가 이어져 있던 계류줄을 풀고 바삐 움직였다. 나는 드디어 가는구나 싶었다. 옆 테이블에 가방을 잠시 맡기고 선상 카페에서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사 왔다.
오전 10시, 선원들이 다시 항구에 배를 정박시켰다. 갑판 위에 있던 승객 수 십명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듯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누군가가 요청을 했는지 이젠 30분에 한 번 꼴로 영어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갑판 쪽 음향 컨디션이 좋지 않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꼼짝도 못 했다. 새벽 6시에 와서 선점한 ‘지중해가 잘 보이는 가장 좋은 자리’를 뺏길 수 없었기에 화장실도 가지 않고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그리스 여자에게 물어 날씨가 좋지 않아 출항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통스러웠던 건 작열하는 태양이었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손차양을 만들지 않으면 눈을 뜰 수 없었다. 선글라스도 지중해 태양은 이길 수 없다.
오전 11시. 이 모든 기다림의 결말이 났다.
“오 지져스! 오늘 배 안 뜬대요! 취소래요!”
대각선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의 외침을 시작으로 블루스타페리는 그야말로 카오스 상태에 돌입했다. 여기저기에서 각국의 언어로 욕이 들려왔고, 모든 사람들이 뇌정지 상태로 잠시 멈춰있었다.
자그마치 4시간 30분을 기다렸다.
젊은 사람들은 운명을 받아들인 듯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 의자를 거칠게 밀어 넣고 갔다. 나이 든 사람들은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 앉아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나는 비적비적 일어나 난간 앞에 섰다.
급하게 뛰쳐나가는 여자 두 명을 선두로 몇 백명의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는 행렬이 내려다 보였다. 지금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 배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페리가 취소 됐다는 충격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그리스에서 날씨 때문에 항해가 취소되면 뭐부터 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런 변수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때, 항구 앞 블루스타페리 티켓 사무소가 눈에 들어왔다. 제일 먼저 배에서 뛰어나간 여자들이 그곳으로 직행했다. 그때서야 눈치챘다. 티켓을 환불받거나 변경하는 게 먼저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몸에 힘이 빠져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줄지어 배에서 내렸다. 그러는 와중에 바쁘게 검색을 했다. 알아본 결과 그리스에서 페리가 취소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했다. 조금만 날씨가 안 좋아도 바로 취소해 버리는 게 그리스 국룰이었다(그래서 사고가 적다는 분석이 있다).
바다에게는 냉철한 판단을 내리는 게 맞다 생각하면서도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막연한 원망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내가 배에서 내렸을 무렵, 블루스타페리 티켓 사무소는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무소라고 해봤자 노란 컨테이너 박스에 작은 창구 3개를 뚫어 놓은 모양새였다. 이딴 게 이 몇 백명의 민원을 처리할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별 수 있는가. 나는 행렬을 따라 얼결에 줄을 섰다.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고, 사람들은 응축된 분노를 가지고 창구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분노 때문에 더 덥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놀라웠던 점은 창구 직원의 태도였다. 그들은 무표정으로 아주 느리게, 아주 아주 아주 느리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사람의 인내심이 어디까지인지 테스트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느렸다. 한 사람 당 족히 10분은 걸렸다. 환불처리완료 도장을 찍는 데 잉크를 5번이나 찍는 이유가 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냥 툭하고 쾅. 그게 어려워?
페리에서 사람들이 다 내렸을 때쯤 내 뒤로 줄이 길어졌다. 거진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선 채로 기다렸다.
2시간이 지났다.
나는 10kg 배낭을 메고 서 있느라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찐득거렸다. 머릿속엔 68,000원이라는 숫자만 둥둥 떠다녔다. 그 돈을 받기 위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억울하기만 했다. 그때까지도 항해 스케줄을 묻고 내일로 변경할까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나이 든 할아버지가 내 뒤에 있어 순서를 양보하고 뒤로 밀려났다.
오후 2시가 됐을 무렵에야 창구가 가까워졌다. 장장 3시간을 기다렸다. 이제 몇 사람만 더 넘기면 내 차례였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있던 창구 직원이 일어나 셔터를 내렸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 씩 소리쳤다.
“Why!!! Fuck!”
이번에도 어떤 외국인 아주머니가 절규에 가까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훅훅 찌는 피레우스 항구는 사람들의 짜증 섞인 한숨으로 고양되었다. 고작 3명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퇴근을 했으니 이제 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직원은 승객들의 원성은 마다하고 점심으로 뭘 먹을지만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이 마음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줄 하나가 사라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서로 밀고 부딪치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밀려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내 앞에 있던 여자의 말꼬리 머리만 보며 뒤따라갔다. 얼추 비슷한 순번을 유지한 채 옆 줄에 합류했지만 내 뒤에 있던 무리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너 내 뒤에 있지 않았어? 왜 새치기해? 빨리 뒤로 가.”
“내가 분명히 봤어. 우리가 먼저야.”
“뭐 하자는 거야?”
외국인 여자 다섯 명 정도가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싸늘한 표정. 한숨 소리. 어이없다는 듯 비틀린 입꼬리. 내가 당황한 나머지 가만히 있자 그중 한 명이 내 가방을 잡아끌었다. 나는 바보처럼 미안, 미안해, 몰랐어 미안해라고 중얼거리며 뒤로 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은근슬쩍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나는 눈에 띄게 뒤로 밀려났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땅만 봤다. 저들이 정말 내 앞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공황이 오나 싶었다. 내가 앞으로 보냈던 할아버지가 창구 앞에서 티켓을 환불받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줄을 벗어났다.
산토리니가 아른거렸다. 하지만, 누군가가 또 끼어들까 불안해하며 내 가방을 잡아 끈 여자 등 뒤에 바짝 붙어있는 짓은 1초도 더 할 수 없었다. 숨이 찼다.
인종차별이었을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만 콕 집어서 공격한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내가 그들 앞으로 새치기했을까?
확실한 건 그 주변에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없는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서러움이 북받쳤다. 몸에 힘이 빠져 주차장 한편에 주저앉았다. 땀으로 젖은 배낭을 옆에 내려놓고 한동안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블루스타 페리를 쳐다보았다.
집에 가고 싶다.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아까부터 산토리니로 가는 비행기 편을 알아보았지만, 낮부터 저녁까지 전부 매진이었고 밤 비행기는 터무니없이 비싼 금액이었다.
내일 아침 페리를 다시 예매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다시는 이 피레우스 항구에 오고 싶지 않았다. 오늘처럼 또 취소된다면 그땐 정말 짐을 싸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티켓은 블루스타페리 홈페이지를 통해 환불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1개월에서 3개월까지 걸린다는 것. 그렇게 기다려도 못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있었다. 어느 블로그에서는 무조건 현장에서 환불을 받으라고 했다.
어지러운 생각들에 둘러싸여 한참 동안 주차장을 떠나지 못했다.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땀이 식었을 무렵에야 오늘 묵기로 했던 산토리니 호스텔 비용을 환불받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25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내일 오후 비행기 표를 결제했다.
자, 이제 오늘 어디서 묵을지만 정하면 돼.
차근차근 할 일을 하다 보니 남은 것은 ‘지금’ 가야 할 곳을 정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바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바다와 가까이 있어야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것 같았다.
부킹닷컴 지도를 살펴보았다. 공항과 가깝고 바다가 있는 곳에서 가장 저렴한 숙소를 골랐다. 나는 고민할 여유도 힘도 없어 리뷰도 보지 않고 무작정 결제했다. 하루에 37유로. 이름마저 생소한 아르테미다라는 곳에 ‘Summer house Hostel’을 예약했다.
항구 근처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배를 채우자 움직일 힘이 났다. 숙소 근처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잘 가던 지하철 내부 불이 꺼지더니 그리스어로 안내방송이 나왔다. 내가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앉아있자 옆칸에서 온 역무원이 내리라고 손짓했다. 또 내리라고? 이제는 실소가 터졌다. 어딘지도 모르는 지하철 역에 내렸다. 나는 자꾸 피식, 피식 웃었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았겠지.
10분을 기다려 다음 열차를 탔다. 이번에는 내가 역 이름을 헷갈려 잘못 내렸다. 와, 씨발 오늘은 진짜 되는 일이 없네 라는 말이 육성으로 나왔다. 공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려 했는데 내가 내린 곳은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 근처였다. 돈이고 뭐고 당장 누워야겠다는 생각에 택시를 탔다. 출혈이 심했지만 20분 만에 바다가 보이는 마을 숙소에 도착했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주소대로 왔는데 호스텔이 없었다.
별장처럼 보이는 주택만 덩그러니 있어 부킹닷컴을 통해 주인에게 전화했다. 그러자 검은 철제 대문 옆 키박스에서 비밀번호를 치고 열쇠를 얻으면 된다고 안내해 주었다. 여기라고?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빌린 건 분명 호스텔인데.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정원이 있는 앞마당이 있었다.
Summer House Hostel은 유럽식 아치형 흰 기둥으로 둘러싸인 작은 주택이었다. 마당에는 푸른 소나무가 있었다.
주택은 딱 봐도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듯 옛것의 기운이 느껴졌다. 옅은 노란색 외벽과 짙은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대문이 있었고 그 옆 작은 테라스에 철제 의자들이 아무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키박스에서 얻은 열쇠 더미에서 대문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무심코 들어가려는데 발 밑에 흰 조약돌이 가득 든 도자기 그릇이 있었다. 왠지 조약돌을 흩트리면 동티에 씔 것만 같아 옆으로 치워두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나는 이 집의 실체를 마주했다.
내가 빌린 숙소는 단독주택이었다.
사람들이 있는 호스텔이 아닌 혼자 자야 하는 집을 통째로 빌린 것이다. 게다가 7-8명은 충분히 잘 수 있을만한 큰 주택을! 방이 총 4개, 침대만 5개였다.
나는 정신을 잃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이유는 하나다. 제주도 자취 부분에서 말했 듯, 나는 혼자 잘 수 없다. 어떤 공간에서 혼자 자야 한다? 그럼 100퍼센트 확률로 신경과민 상태에 빠지고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심하게는 식은땀을 줄줄 흘릴 만큼 긴장해 한숨도 못 잔다. 그래서 여행 중 호스텔은 필수조건이었다.
호스텔에는 누가 됐든 사람이 있다. 설령 방을 혼자 쓰게 되더라도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인기척 소리를 들으면 안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나 혼자 뿐이다. 이미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느라 소진된 에너지로 이 밤을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집을 둘러보는 것을 그만두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꿈일 거야.
아무리 중얼거려도 내 말에 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내가 겁이 많아서 그런 게 절대 아니라 그 집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창문을 통해 해가 들어오는데 그저 빛만 들어올 뿐, 따듯한 기운은 튕겨져 나가는 듯했다.
이 집에 달린 모든 문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끼이이이익. 지하실 구석에 60년 동안 처박혀 있던 바이올린을 켜면 날 것 같은 소리. 경첩에 고급 윤활유를 퍼부어도 그 소리는 막을 수 없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집에서 공포에 눈이 멀어 요절을 하든,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와 마주쳐 빙의를 하든, 일단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 해가 지기 전에 다녀와야 하기에 서둘렀다.
밖은 평화로웠다.
아르테미다는 그리스 아티키주 동아티키현에 있는 소도시다. 이곳은 1980년대 이후 아테네의 여름 해변 휴양지로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중산층은 여기에 휴가용 별장을 마련했다. 그 덕에 아르테미다 해변에는 카페, 레스토랑, 술집, 상점 등이 늘어서 있다. 도시명은 사냥과 숲의 여신 ‘아르테미스’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름이었다면 이 작은 도시도 활개를 띠었겠지만, 9월이라 조용했다.
고즈넉한 동네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희고 낮은 담 너머로 빨간 부카델리아 꽃이 피어 있었다. 아테네 중산층이 소유한 서머하우스들은 텅 비어있었지만 동네에 몇몇 주민들이 돌아다녔다.
꽃무늬 비치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동양인을 본 주민들의 표정은 볼만했다. ‘도대체 여기에 왜 온 거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에 악의는 없어 보였다.
큰길로 나가자 바다가 보였다.
저물어가는 태양과 바닷바람, 커다란 야자수 나무와 파도소리가 좋았다. 도로 옆 좁은 인도를 따라 걷다 멋진 분위기의 해변 바를 발견했다. 그러나 손님이 한 두 명 밖에 없어 쓸쓸해 보였다.
작은 주유소를 지나 이 동네 유일한 슈퍼마켓에 도착했다. 오래된 코카콜라 광고 포스터를 붙여놓고 비치볼을 여러 개 매달아 둔 것으로 보아 슈퍼마켓인 건 확실한데 내부가 너무 깜깜해서 멈칫했다.
그리스 전기세가 비싼가?
일단 문이 열려 있어 조심스레 들어갔다. 인기척을 들은 주인이 안쪽에서 서둘러 나오는 게 보였다. 놀랍게도 영업 중이었다.
가게 안은 갖가지 식료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도 큰 편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같은 물건이 매대 한 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건은 많아 보이지만 종류는 다양하지 않았다. 주인은 눈속임으로 큰 슈퍼마켓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어딘가 짭조름하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30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 같다. 건물이 한 번 지어졌으면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마구잡이로 재개발하는 한국보다는 나은 법일지도 모른다.
나는 해변에서 먹을 샌드위치 재료가 필요했다. 마요네즈, 바게트빵, 치즈, 살라미. 유럽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다. 그런데 마요네즈에서부터 막혔다. 커다란 유리병에 담긴 마요네즈뿐이라 한 번 먹고 버리기엔 부담스러웠다. 그 병을 들고 비행기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소스는 포기.
다음은 바게트 빵. 그것도 없었다. 빵이 잔뜩 쌓인 선반 앞에서 한참 뒤적거리자 뒤에서 나를 보고 있던 주인이 말을 걸었다.
“도와줄까?”
“바게트빵 없나요? 샌드위치 만들어 먹으려고요.”
“어……”
영어가 짧은 주인이 선반 앞으로 와 커다란 빵봉지를 쥐어 줬다. 바게트가 아니라 길쭉한 모닝빵이 잔뜩 들어있는 봉지였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다음으로 넘어갔다.
“살라미?”
“예스 예스.”
수더분한 인상의 배불뚝이 주인아저씨는 나를 다음 코스로 데려갔다.
커다란 쇼케이스 냉장고가 있는 신선 식품 코너에는 연로한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거대한 치즈와 육류, 소시지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나름 통역가 역할을 하며 할아버지에게 살라미 하나를 꺼내 달라고 했다. 플라스틱 팩에 담긴 살라미를 얻었다.
이제 치즈만 고르면 되는데 적당한 치즈가 없었다. 나는 치즈를 사양한 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골랐다. 적당한 라거 맥주를 골라 꺼내는데, 주인아저씨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스 치즈! 페타 치즈.”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치즈 하나를 건넸다. 자랑스럽게 추천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전통 치즈 맛을 꼭 봐야 한다는 뜻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페타치즈를 싫어한다. 꾸덕한 식감에 텁텁한 끝맛이 싫어 어제 아테네에서 먹은 페타 치즈 샐러드도 거의 다 남겼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오늘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한 그가 저렇게 웃으며 먹어보라 하는데. 나는 치즈를 받아 계산대로 갔다.
“여행?”
“네.”
“아르테미다 며칠?”
“온리 하루.”
“어오오오옹… 슬픔.”
계산을 하는 동안 짧은 영어단어로 대화했다. 말이 짧아서 그런지 주인아저씨의 표정이 참 풍부했다. 특히 Sad라고 말한 부분에선 진심으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의 친절에는 시골의 순수함이 서려있었다. 관광지에서는 볼 수 없는 친근한 표정과 말투. 마치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정성스레 대접해 주는 행동. 타지에서 온 나에 대한 호기심에서 오는 질문들.
이곳에 어쩌다 흘러들어온 나에게는 그의 환영이 큰 위로가 되었다. 페타 치즈를 거절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에게서 아르테미다에 대한 애정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봉지에 먹을 것을 가득 들고 해변으로 갔다.
바다와 가까운 곳에 바나나 잎으로 만든 파라솔이 있었다. 그 밑에 앉으려다 샌드위치에 모래가 들어갈까 싶어 야자수 나무 옆 벤치에 자리 잡았다.
해가 구름에 가려진 해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신기했던 건 조금 떨어진 곳에 한국인 두 명이 있었다(확실하다 딱 봐도 한국인). 너풀너풀한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폴로셔츠에 베이지 색 면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둘은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닐다 내 쪽을 힐끔힐끔 봤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그쪽에서도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챈 눈치였다.
사실 당장 가서 말을 걸고 싶었다. 오늘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라던가 블루스타페리 타실 계획이라면 조심하세요 라던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참았다. 내 외로움 때문에 남의 신혼여행을 망칠 수는 없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빵을 찢어 갈라 살라미를 욱여넣고 페타 치즈를 숭덩숭덩 집어넣어 한입 베어 물었다. 최악의 맛이었다. 맥주가 없었다면 퍽퍽해서 삼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눈앞에 에게해가 펼쳐져 있지 않은가.
두 번째 샌드위치는 페타 치즈를 빼고 만들 요량이었다. 빵 봉지를 집어드는데 갑자기 불쑥 개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한 놈은 크림 브라운색, 다른 놈은 검은색. 골든 리트리버 같이 생겼는데 털이 짧고 래브라도 리트리버라기엔 얄쌍했다.
녀석들 목에 빨간 목줄이 채워져 있는 걸 보니 근처에서 키우는 개인 듯했다. 이 부근에서는 개를 산책시키는 대신 그냥 대문을 열어 두는 모양이다. 놈들도 알아서 잘 놀다 들어간다.
이 덩치 큰 개 두 마리는 한 배에서 태어난 게 틀림없었다. 어딜 가나 세트로 붙어 다녔다. 둘 다 잠시도 가만히 못 있고 촐싹 대며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챘다.
나는 빵을 조금씩 떼어 주었다. 녀석들은 순식간에 삼켜버리고 끝도 없이 달라고 들이댔다. 결국 빵을 거의 다 빼앗겼지만 웃음이 나왔다. 그래, 너희 주려고 이렇게 많이 샀구나 하며 한참 쓰다듬었다. 녀석들은 바다에서 얼마나 신나게 수영을 했는지 털이 흠뻑 젖어있었다.
“어디 나라 사람이니?”
누군가가 대뜸 말을 걸었다. 불뚝 나온 배, 벗어진 머리, 튀어나온 눈. 아까 본 슈퍼마켓 주인아저씨의 형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은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비치 타월로 젖은 몸을 닦으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한국에서 왔어요.”
“북한, 남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다. 질리게 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대화의 흐름이 북한 쪽으로 타고 가면 대게 무례한 질문으로 끝난다. 나는 “당연히 남한이죠.”라고 대답했지만, 싫은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남의 기분을 살피는 능력이 없는 듯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홀리데이? 그리스에서 홀리데이?”
“예스-“
특이했던 점은 그의 목소리다. 성대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 특이했다. 마치 누르면 꽤애액 소리가 나는 닭모양 장난감 같았다. 온몸에 잔뜩 힘을 주어 말해서 그런지 말을 더듬었다. 그의 입가엔 파도가 부서지듯 하얀 거품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춥지 않나요?”
“온도. 높아. 따듯해.”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혼자였고 그도 혼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개 두 마리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못 알아들을만한 발음이었다.
“나는 내일 또 수영을 하러 여기에 온다. 정오쯤에. 너도 거기에 있을 거니?”
“아니요. 저는 내일 산토리니로 가야 해요.”
“아! 산토리니! 아름다운 섬!”
“예쓰! 뷰티풀!”
그와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나도 덩달아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만약 그가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파티장에 턱시도를 입고 등장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았다. 나도 모르게 쿡쿡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의 이름은?”
“옌!”
“나의 이름, 요르고스.”
통성명도 했겠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의 툼툼한 손을 잡아 흔들었다. 9월의 바다를 수영한 사람치고 손이 따듯했다.
“만나서 저.. 정말 반가웠어, 옌.”
“미투 미투…!”
그가 빨간 스포츠 백을 들고 떠날 채비를 하며 말했다.
“네가 멋진 휴가를 보.. 보내고…… 산토리니에 가서 아.. 아름다운 날들을 보내길 바래!”
그가 하는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한글을 처음 깨우친 7살짜리가 꾹꾹 눌러쓴 일기가 아닐까 싶었다. 오느른 한국인 여자를 만나따. 오랜마네 영어를 해서 긴장됫지만 재미섯다, 이런 느낌.
“아주 고마워! 좋은 하루 보내!”
그가 떠나고 난 뒤 아주 크게 한숨을 쉬었다. 분명 즐거운 대화였는데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던 이유는 뭘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노을이 지기 전에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준 빵 때문인지 해변에서 만난 개 두 마리가 나를 따라왔다.
두 녀석은 마치 나를 에스코트하듯 전방을 주시하며 내 걸음에 맞춰 걸었다. 서로 목덜미를 무는 장난을 치다 모래밭을 구르고, 저 멀리 앞서 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길가에 뚫려있는 철조망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법을 몰라 헤매고… 녀석들은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덕분에 쓸쓸할 줄 알았던 길에서 몇 번이나 웃었다. 집에 도착할 때쯤엔 너희들도 우리 집에 갈래? 같이 자면 안 무서울 것 같은데 하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잠가 두었던 대문을 열었다. 그런데 내 옆에 있던 녀석들이 기다렸다는 듯 마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당장 나오라며 소리쳤지만 녀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을 구석구석 헤집어 놓았다. 개똥이라도 싸놓으면 어떡하나 싶어 양몰이를 하듯 녀석들을 쫓았다.
한참 뛰어다닌 끝에 겨우 마당 밖으로 내몰았다. 철대문을 굳게 닫고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녀석들은 꽤 오랫 동안 대문 주변을 맴돌며 꼬리를 빙빙 흔들었다.
나는 마당 가운데에 때뚱 선 채로 그 개 두 마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소동이 끝나고 정말 혼자가 되고 나서야 해가 졌다. 나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온 집안에 있는 불을 다 켜도 우중충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깜깜한 그리스 시골 동네 단독주택에 남겨진 나.
그 사실이 확 몰아치자 개들을 내쫓은 게 후회됐다.
오후 10시가 됐다. 이제 완전한 밤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단 1초도 핸드폰을 놓지 못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이 집 와이파이 상태가 아주 좋아서 유튜브로 무한도전을 틀어 놓을 수 있었다.
대문이 잠긴 것을 3번이나 확인한 뒤 집안에 있는 모든 창문을 걸어 잠갔다. 밤새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면 밤길을 걷던 누군가의 표적이 될까 봐 커튼을 치고 방문을 닫았다.
그래도 마음이 불안했다. 이 낡은 집은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취약해 보였다.
나는 와이파이가 가장 잘 되는 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옮겨 놓고 침대에 누웠다. 매트리스 스프링이 금방이라도 시트를 뚫고 튀어오를까 염려될 정도로 거칠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잘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그 부분에서부터 사라졌다.
자정을 넘긴 시점부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집안 곳곳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특히 노란커튼이 있는 방 쪽에서 40-50초 간격으로 깨엑- 깨엑-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병아리를 밟아 죽일 때 나는 소리 같았다(병아리 밟아 죽이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길).
내가 6살 때, 동네에 있던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사서 키웠다. 그 병아리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 병아리가 내 손에서 툭 뛰어내린 것도 모르고 뛰다가 밟았다. 물컹한 느낌과 깨엑- 하는 소리가 들렸고 천천히 발을 떼보자 연하고 붉은 내장이 노란 털과 함께 곤죽이 되어 있었다.
나는 아스팔트에 붙은 껌처럼 납작해진 그 병아리를 두고 집까지 뛰었다. 한동안 충격으로 인해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내가 신었던 운동화를 버렸고 꽤 오랫동안 그 길을 지나가지 못했다.
나는 깨엑- 깨엑- 쿵, 하는 소리를 들으며 6살의 나로 돌아갔다. 침대 속에 웅크린 채 피가 날 때까지 손톱을 물어뜯었다.
바람이 그런 거야. 바람이 그런 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용없었다. 그 소리들은 내 귀를 타고 전해져 심장을 쿵쿵 뛰게 했고 그렇게 과열된 몸에서 땀방울이 흘렀다.
밤에 화장실에 가고 싶을까 봐 아까부터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말라 까끌거렸다.
그 상태로 동이 틀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에 선잠을 자고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났다. 벌써 4일째, 2시간 이상 푹 잔 적이 없었다. 나는 몽롱한 상태로 병아리 소리의 실체부터 확인하러 갔다. 범인은 역시 노란 커튼 방에 있었다.
흰 장롱에서 나는 소리였다.
창문 틈새로 바람이 불자 장롱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나는 소리. 나는 신경질적으로 열려 있던 문짝을 세게 닫았다. 그러자 소리가 멈췄다. 창문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장롱 문을 제대로 닫았다면 밤새 괴로울 일은 없었을 텐데.
안도감이 들자 그제야 눈물이 났다.
자, 이 시점에서 내 그리스 여행 중 가장 어이없고 황당한 사건이 나온다. 놀랍지 않나?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니.
나는 비행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갔다. 늦을까봐 거금을 들여 택시를 탔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그때의 나를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보딩 타임까지 여유가 있다고 판단했고,
탑승 수속을 하기 전 공항 로비에 앉아 지금까지 찍은 사진과 영상을 노트북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확 들더니 어? 나 지금 늦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랴부랴 항공사 카운터로 갔다. 줄을 서는 동안 쎄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줄을 서고 있을 때 이미 비행기가 뜰 시간이었다.
나는 분명 비행시간과 현재 시간을 수시로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차가 막혀 공항에 늦게 도착한 것도, 줄을 서느라 늦은 것도 아니라 그냥 시간을 착각했다!
“산토리니 행 비행기는 이미 뜨고 없습니다. 당신은 비행기를 놓쳤어요.”
항공사 직원의 말을 들은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그리고 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 집에 있던 귀신에 씌었던 게 분명했다. 깨엑- 깨엑- 쿵, 하던 소리는 바람 때문에 났던 소리가 아니라 귀신의 장난이었다고 생각한다(공항에 있는 내내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 과실로 비행기를 놓쳤기 때문에 여행자 보험 처리는 고사하고 티켓 변경도 불가했다. 나는 6시간 뒤에 있는 저녁 비행기를 다시 결제했고(25만 원....), 공항 안에 있는 버거킹에서 시간을 죽였다.
멍하니 앉아 치킨 버거를 씹으며 생각했다. 마음에 그득그득 쌓아두었던 보상심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나는 첫날 호스텔에서 샤워를 하며 버렸고, 또 하나는 페리가 취소 됐을 때 버렸고, 또 하나는 어젯밤 그 집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버렸고,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하나마저도 비행기를 놓치며 버려졌다.
그리스 사건들을 계기로 나는 무언가를 바라며 여행한 적 없다. 그저 오는 행운을 행운 그 자체로 보고 기뻐했으며, 오는 불행을 불행 그 자체로 보고 극복할 생각만 했다. 그리스는 내게 비움의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비단 여행 중 겪는 고난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좋은 마음가짐이었다. 뭐,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일이 닥치면 평정심을 잃곤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어스름한 저녁에 만났던 개 두 마리와 요르고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개를 쓰다듬을 때 느꼈던 축축한 감촉이나 그의 특이했던 목소리가 내 고생을 미화시켰다. 시간이 흐르면 불행은 마음의 근육이 되고 사소한 행복이 그 주변을 감싼다. 그렇게 살아가나 보다.
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이자면, 나는 아르테미다 서머하우스 사건 이후로 혼자 잘 수 있게 됐다. 다시 그 집에서 자라고 하면 몸서리치겠지만, 언젠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이 그때인가? 고맙다, 아르테미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