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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naim Lee May 14. 2022

기대거나 기대하거나

20220317

1

내가 눈이 상당히 높은 거였구나 나랑 비슷한 사람도 없어서 연애는 못하고 있어요 엄마 이번 생에는 기대를 하지 맙시다 다음 생에 아들로 태어나 아이돌로 효도할게 미안해 딸로 태어나 내가 겪어온 세상은 희롱 추행 강간당한 이슈들 밖에 전할 게 없어서


2

착하면 등신이야 네 아빠처럼 무능력한 사람이 될 뿐이야 엄마가 말하던 선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능력과 여유가 있어 베푸는 사람이었겠지 나 역시 엄마를 닮아서 능력보다는 착하고 재능 많고 단아한 사람을 찾고 있나 봐 안목도 유전이라고 당신을 통해 알았지 엄마의 청춘에는 가난밖에 없어서 어쩌면 내게 보여줄 미래가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나의 미래에는 부유를 마시고 싶어


3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을 안아주려고 했던 건 우리가 믿었던 진리와 같은 뜻이었기 때문이었어 그들을 외면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고 그것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습득하면서부터 그들에게 집착해왔는지도 몰라 나부터 약자였으면서, 동질감으로 이웃의 고통을 내 몸과 같이 아파하면서, 우리 다 같이 천국에 가자고. 그들을 안아주면 내가 정화되는 마음이었어 어쩌면 내가 가장 악한 존재였는지도 모르지 그걸 망각한 채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르지


4

약자들 틈에 악한 자들이 있고 강자들 틈에 선한 자들이 있어 흑과 백으로 갈라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람은 우주처럼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며 양가적이잖아 신처럼, 이 땅에 우리는 신의 모조품으로 숨을 쉬는 것 같아 이런 우리에게 구원이 있을까


5

인간을 혐오하게 되는 순간 나 스스로를 부정하게 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용서는 쉽지가 않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걸 알면서도 사람과 사랑을 쫓고 감각에 집착하다가 고꾸라지지 후회하고 반성해도 선을 긋는 것은 쉽지가 않아 나는 지금 그 어떤 테두리도 그리지 않은 운동장에 서 있어


6

배는 조금만 채워도 배부른데 통장은 채워도 채워도 고장 난 수도처럼 새어나가, 엄마 우리에게도 집이 생길 수 있을까 폐가에서도 살아보고 폐공장에서도 살아봤지만 나 다시 그때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 그때의 지옥은 선택할 수 없었고 지금은 선택할 수 있으니까


7

기댈 곳이 없어 엄마

기대할 것이 없어 엄마


8

통장잔고가 눈처럼 쌓인다 죄다 녹아버릴 결정들이지만

겨울이 지나고 짙은 봄이 솟구치면 조금은 살만하다고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날씨가 사람의 기분을 좌우하기도 하니까 그나마 영화에 집착해서 다행이야

나를 유일하게 하루라도 더 살고 싶게 하니까


9

살아서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나라면 사람들에게 억지 긍정을 심어주고 싶진 않아요

단지 우리 이 지옥에서 조금이라도 즐겨보자고 에쎄머처럼 고통도 쾌락으로 치환시켜보자고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경험해보고 가자고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보자고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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