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이란경을 추억함

by 외별

<이란경을 추억함>


비가 오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름, 이란경. 남들처럼 사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틋한 짝사랑을 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녀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1984년 대학 2학년 때, 그때 나는 전공이고 뭐고 다 관심이 없고 오로지 연극과 그림에만 심취해 있었다. 그런 나와 항상 동행하는 것은 낡은 화구 가방이었고 가끔은 액자를 맞추기 위한 캔버스가 덤으로 붙어 있기도 했다.


가끔 스케치를 위한 방황을 끝내면 귀소 본능인 양 찾는 학교 앞의 작고 아담한 카페가 있었는데 그곳은 내밀하게 숨겨놓은 혼자만의 다락방 같은 곳이어서 항상 혼자서 찾아가 지친 몸을 쉬곤 했다. 병맥주 서너 병과 블랙커피와 뉴튼 패밀리의 스마일 어게인. 그곳에서의 내 필수 메뉴였고 그것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이란경)가 쪽지를 보내왔다. 대학 노트의 한 귀퉁이를 찢은 사각의 엉성한 메모지에 달필로 적은 몇 자가 선명하게 동공을 뚫고 들어왔고 그제야 난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기실 그녀는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내겐 그저 익숙한 사물의 하나쯤으로 넘기 곤 했었던 것 같다.


쪽지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어떤 생각?

어떤 생활?

어떤 가치관?


그리고는 롱펠로우의 <인생 예찬> 한 구절이 적혀 있었다.


무슨 구구절절한 사연이 적힌 것도 아닌 저 짧은 쪽지를 건네고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일을 했다. 아주 무심하게.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그 순간부터 내 눈에는 그녀가 크게 들어왔었다. 유심히 보니 훌쩍 큰 키에 유난히 빛을 발하는 아주 지적인 풍모와 커다란 슬픈 눈이 무척 미인임을 알 수 있게 했다.


그 나이 또래의 사내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런 미녀를 보면서 속이 울렁이지 않을 사람은 없을 듯했다. 나 역시도 "아! 왜 저런 미녀를 여태껏 못 알아봤을까?" 하면서 빈약한 관찰력을 탓하고, 마치 방금이라도 떠나갈 기차인 양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무심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난 포기했다. 관심이 아니라 그냥, 늘 같은 자리, 같은 신청곡, 같은 메뉴를 주문하는, 늘 혼자 오는 내게 대한 호기심 정도구나 하고. 어쩌면 조금은 절망에 가까운 포기. 그런 비슷한 심정으로 다시 내 자신에게로 돌아와 김지하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원래 그곳에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졌다.



아마도 두세 시간쯤 앉아서 그곳에서 책을 읽고, 창밖의 어둠이 짙어진 후에 카페의 밖으로 나왔다. 밖은 세차게 비가 퍼붓고 있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비. 우산을 펼 생각도 하지 않고 오는 비를 다 맞고 있는데,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낯선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왜 이제 나왔어요? 한참 기다렸는데..." (아마도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아뿔싸! 그녀였다. 이란경.


그녀는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나고 나서 내가 카페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처음엔 잠깐만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는데, 이래저래 시간이 가서 두 시간이 넘게 기다렸다고 한다. 그녀에게서도 세 찬 빗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날, 그녀와 난 우리 학교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 앞에서 그 무지막지한 비를 다 맞았다. 사가지고 간 소주보다 빗물을 훨씬 많이 들이켰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녀와의 성찬.


이웃학교의 xx과에 다닌다는 나와 동갑내기의 그녀.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금세 흉금을 털어내고 친해져 참 많은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연락처를 주고받지 못하고 (왠지 연락처를 물어보는 것이 쑥스럽고 진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늦은 밤에 그녀와 헤어졌다. 밤길이 위험하니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나를 한사코 돌려세우고는 취한 걸음으로 훠이훠이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녀의 모습을 카페에서 볼 수 없었다.


슬펐다. 그리고 왜 이유도 없이 모습을 감췄을까? 문득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그녀는 곁에 없었다.



그리고 2년의 시간이 흐르고 대학 4학년이 되어 신촌 기차역 앞에서 그녀를 우연히 다시 봤다. 데모 때문에 쫓기고 있다는 그녀. 나를 보자마자 무조건 밥부터 사달라고 하는 그녀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 대학 2학년 때의 그 아름다운 모습은 오간데 없고 피곤에 지치고 여윈 모습이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반주와 함께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운 그녀는 너무도 담담히 2년 전의 일을 말했다.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그러나 그리웠다고 그리고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노라며 눈하나 꿈쩍 않고 말하는 그녀. 마치 남의 말을 하고 있는 듯한 그녀는 뜻밖의 말을 했다.


"너에게 내 처녀를 주고 싶어"


진지한 그녀의 표정에서 그냥, 치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아주 오랜 시간동 안 나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순간 그녀에게는 누군가 절실히 필요했고 단지 나는 그 순간 그녀의 곁에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그때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랑하는 사람과의 의리 때문에 그녀에게는 굳은 악수 이외에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그 후 그녀는 가끔 학교로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는 겨울이 오기 전 어느 날엔가 내게 테이프 하나를 건네주고는 알 듯 모를 듯 옅은 미소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 테이프에는 그녀가 육성으로 녹음한 스마일 어게인 노래와 함께 "사랑했었어,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너만 사랑할 거야"라는 마지막 멘트가 남겨 있었다 그리고는 이후로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어디에서도.



비 오는 날 어김없이 떠오르는 그녀. 그녀는 왜 나를 사랑했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녀의 엉뚱하고 아름답지만 슬펐던 눈동자와 곱디고왔던 긴 손가락이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서 어느 아이의 엄마가 돼서 잘 살고 있는지, 그녀가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난, 또 뉴튼 패밀리의 스마 일 어게인을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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