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書 08

자작시 <난해시론 no.3 _ 양자역학적 약속>과 해설

by 외별

<難解詩論 no.3 _ 양자역학적 약속>


너와 나는, 사랑을 방정식으로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우리의 헤어짐은 헤어짐이 아니다

2×1=2
1×2=2

이것이 참이라는 것은, 이미 양자역학적 사고에서 부인된 지 오래다. 네가 아는 것은 이 수식으로 정립된 명제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적 영역 안에서만 참이다

헤어짐은 순서를 바꾸는 순간 만남이 되기에 곱하기 기호 ×가 갖는 가역적 효용에 대한 주장은 미지수 X에게나 줘야 한다

이제, 나는 1이고 너는 2다. 애초부터 우리는 한데 엮여서 1이 된 적이 없다. 우리의 곱하기는 늘 자연수에서 존재하지 않는 허수다.

하지만, 너와 나로만 나눠지는 소수素數는 우리의 약속 속에서 은하를 만든다.


/畏瞥/





<자작시 해설>

이 시는 ‘사랑과 이별’이라는 감정의 서사를 수학·물리의 언어로 번역하면서, 그 언어 자체를 다시 해체하는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난해하지만, 난해함이 장식이 아니라 논증의 형식으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몇 개의 핵심적인 시적 장치를 해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글을 쓴 내가 설정한 여러 의미 중에서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표면적 사유일 뿐, 이 시의 알파와 오메가를 다 총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독자가 갖는 개별적 해석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으며 옳은 작업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 방정식으로 약속하지 않았다는 선언

“한 번도, 사랑을 방정식으로 약속한 적 없기에”

이 첫 문장은 이 시 전체의 윤리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을 명제, 규칙, 합의된 결괏값으로 환원하지 않겠다는 시적 화자의 기본 태도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방정식은 예측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일한 입력이 있는 경우 동일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관측자에 따라 달라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랑은 처음부터 ‘고전역학’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별 역시 “정의될 수 없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2×1=2", "1×2=2 " : 같아 보이는 것의 폭력성

“이미 양자역학적 사고에서는 부인된 지 오래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실제 물리학의 정확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 글을 읽으면서 예상한 바와 같은, 시적 은유라 하겠습니다. 고전적 사고의 관점에서는 '순서가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라고 하겠으나, 양자적 사고의 관점에서는 관측 순서, 위치, 관계가 상태를 바꾼다. 즉, 같아 보이는 결과가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믿음 그 자체가 폭력이라는 주장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에서는 '누가 먼저 다가왔는지', '누가 먼저 떠났는지', '누가 누구를 정의했는지' 이 순서는 절대 가역적이지 않다는 것은 다시 말하는 것이 사족보다 의미 없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저는 믿습니다


○ “헤어짐은 순서를 바꾸는 순간 만남이 된다”의 역설

이 문장은 제게는 아픈 칼입니다. 겉으로는 낭만적 문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냉소에 가깝다는 느낌으로 적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다음에서 보다 상세하게 개념을 발전시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곱하기(×)의 가역성은 '누구나 쉽게 주장하는 화해의 논리'가 되며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시간만 바꾸면 다시 만남이다” 혹은 “상황만 다르면 사랑이었다”라고 쉽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말을 합니다.

“그 효용에 대한 주장은 미지수 X에게나 줘야 한다”

이건 감정적 분노가 아니라, 논리적 폐기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사랑에서 순서는 윤리이고, 윤리는 바꿀 수 없는 값이라는 선언이 되는 것이죠


○ “우리는 애초에 1이 된 적이 없다”

나는 이 대목을 나의 이 시의 정점에 놓고 싶었습니다.

“이제, 나는 1이고 너는 2다.”

일반적으로 통속적 사랑 시에서는 “우리는 하나였다”라는 문법을 유지하는 게 일상이지만 나는 이 시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둘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관계에서 곱하기는 실패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곱해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의 곱하기는 늘 자연수에서 존재하지 않는 허수다”

계산은 가능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허수의 존재처럼, 사랑은, 경험은 있으나, 사회적·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던 상태인 것이 됩니다.

즉, 사랑은 있었지만 ‘정의된 적은 없었다’는 고백에 다름 아닙니다.


○ 소수(素數)와 은하 : 유일성의 마지막 구원

“너와 나로만 나눠지는 소수는 우리의 약속 속에서 은하를 만든다”

여기서 소수는 오직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눠지는 수로서, 타인에게 분해되지 않는 관계이며, 이별 이후에도 남는 것은 결합(×)이 아니라 공약 불가능한 유일성이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대체 불가능한 두 개의 별이 된다"

은하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되 합쳐지지 않는 질서임을 말하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나는 이 시를 통해 사랑을 합(+)이나 곱(×)의 서사로 말하는 모든 관습을 부정하고, 대신 관계의 비가역성, 순서의 윤리, 정의 불가능성을 시의 논리로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의 태도는 낭만이 아니라 지적 애도에 가깝고, 사랑을 부정하지 않되, 사랑을 설명하려는 모든 쉬운 언어를 거부하는 방식을 견지한 것입니다.

이 연작의 제목이 <難解詩論>인 이유는 이 글이 난해해서가 아니라, 쉽게 이해되는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나의 시에 대한 개괄적 해설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가졌던 원래의 신념인 "시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는 것에는 추호의 변화는 없습니다. 다만, 내게는 처음 있는 이와 같은 시도와 실험을 통해, 내 외부에서 서성이는 많은 인격들과 시적 교분의 외연을 확장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나는, 여전히 말하고 싶습니다. 독자가 보고 있는 글의 모양, 느낀 그 감정이 이 글 모야에 옳은 것이고, 맞는 해석이라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별/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