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다/외별] 해제
시를 해부하다
제 글의 애독자이신 익명의 독자께서 보내주신 제 시 <지하철을 타다>에 대한 해부 글을 올려봅니다.
저는 원래 시에 현미경이나 메스를 들이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아래의 글은 마치 제 안을 속속들이 읽어내신 후에 해부기록을 수록한 듯하여 옮겨 봅니다. 매우 긴 글이나 제 시에 대한 본격적 해부서리는 점에서 제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글을 쓰시기 위해 깊이 사색하셨을 ㅇㅇ선생님께 심심한 김사의 마음 전합니다
[지하철을 타다 / 외별] 해제
제게는 버리지 못하는 오래된 편지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저를 좋아하고 저 역시 좋아했던 남자 친구가 보낸 꽃편지 몇 통이지요. 연필심에 침을 발라가며 꾹꾹 눌러썼음이 분명한 또박또박 쓴 글씨가 여전히 광채를 발하는 편지. 지금도 가끔 펼쳐보는 그 편지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도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서는 그 친구에게서 오는 편지는 예쁜 우표가 붙어서 우체부 아저씨 가방에 실려 오는 것으로 변했지요. 골목 어귀를 돌아 큰 가죽 가방을 메고 가는 우체부 아저씨를 보면 괜스레 마음이 설레던 시절이었습니다.
외별님의 시 <지하철을 타다>를 보면서, 제 오래 전의 해묵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외별님의 시에서 사람 사이에 있는 길의 의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연락 수단 혹은 상대방에게 연결되는 이기利器는 너무도 많습니다. 누구나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휴대폰을 열고 버튼 한두 개만 누르면 그냥 원하는 사람의 휴대폰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뿐입니까? 일반 가정이면 거의 모두 있는 컴퓨터가 거리에도 피시방이라는 공간에 즐비하게 비치되어 있어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상대방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죠. 이제 더 이상 기다림은 필요가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편리한 이기들을 이용하여 사람들은 손쉽게 영혼의 원나잇 스탠드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다림과 설렘으로 숙성된 만남이 아니기에 공장에서 찍어낸 인스턴트 식품과도 같은 일회성 만남과 이별이 아무런 여운 없이 도처에 독버섯처럼 자라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시인의 시를 보겠습니다. 1연과 2연을 보면
/오리역에서 / 3호선을 타고 간다 / 나는
/너는 / 오이도에서 4호선을 타고 / 온다고 했더군 / 약속도 없는데
약속도 없는데 서로 다른 '너'와 '나'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현대문명의 이기인 휴대전화가 있어 확인이 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시로 약속을 정할 수 있는 사이라면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여야 마땅할 텐데 시인은 1연의 마지막 행에 '나는'이라는 시어를 배치하고 2연의 시작에 '너는'이라는 시어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무척이나 긴밀한 사이인 것 같아 보이는 '너'와 '나'는 시의 연을 갈라 배치할 만큼 실은 먼 사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연갈이를 오리역과 오이도라는 공간적 거리의 이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자의 의미로 읽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는 긴밀한 사이 같지만 영혼의 이격거리가 시의 연 사이만큼 떨어져 있는 '너'와 '나'는 "/을지로 3가 환승역 / 어디쯤에선가 조우를 원하겠지만 / 너는 내게 다가온 거리만큼 늙고 / 나는 널 기다린 시간만큼 풍화"되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물리적으로 풍화되어 물리적으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풍화되어 영혼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럴까요? 고작 한두 시간의 거리일 뿐일 텐데 그 사이에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의 해답은 지하철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궤도 위를 달리는 교통수단인 지하철은 원래부터 계획된(정해진) 노선만을 달려갑니다. 또한 차밖의 풍경도 인위적인 축조물인 지하터널을 통과하며 빛과는 유리되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는 행위는 선택이지만 역과 역 사이의 구간에서는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으로 인한 행위는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길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지요. 사람의 발걸음의 집적이 길의 형태로 나타나는 전통적 의미로의 길과는 너무도 다른 지하철인만큼 전통적 의미로의 길을 걸을 때에 걷는 주체의 판단이나 행위의 자유로움이 지하철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기에 그 자유의지가 없는 시간만큼 인간은 타율에 의해 억제된 상태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자유가 억제된 상황에서는 영혼은 쉽게 풍화됩니다. 아주 오랜 시간 단련된 무쇠 같은 영혼이라면 문제는 다르겠지만 인스턴트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영혼은 쉽게 풍화됩니다.(하긴 자신의 자유가 억제된 상황이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대다수이겠지만...) 그렇게 풍화된 영혼이기에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현대문명의 이기에 의존한 영혼의 가벼운 만남에 대한 회의와 외부의 강제된 상황(지하철)에 의한 풍화(좌절)를 말이지요. 이와 같은 인식은 다음의 연에서 '햇빛 한 줌 없는 지하'와 '충혈된 눈'이라는 진술을 통해 절망의 정서로 표출됩니다.
서로 익숙한 장소인 환승역에 섰을 때 자신에게 의미 있는 시선은 발견하지 못하고 의미 없는 눈빛이 폭포를 이루고 있는 광경만을 목도하게 됩니다. 눈이 마주쳤을 때, 다시 말해서 시선이 교환될 때 서로의 관계에서 의미가 시작되는 것이련만 눈앞에 펼쳐진 눈빛은 모두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무심한 눈길만이니 그 절망은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이 되고 시인은 마지막 진술을 합니다.
/지하철이 뱉어낸 수많은 / 닮은 사람들 중에 / 내 기억 속의 너는 없다/
/네 기다림 속의 나 역시 없다 / 머물지 못해 갈아타서 / 또 다른 외길로 황급히 가고 있을 뿐 /
현대인이 무장한 모든 이기들은 공장에서 같은 생산라인을 통해 생산된 것이고, 지하철이라는 동일 노선을 달려온 사람들이기에 모두들 닮아있기에 '나'와 '너'를 구분하는 아이덴티티는 실종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내 기억 속에서 '너'를 '너'로 서게 했던 아이덴티티는 지하철을 타고 오는 동안 소멸되거나 혹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상실하고 말았기에(이것은 시적 화자도 동일한 상태이다) 영혼의 동거는 없이 또 다른 외길로 황급히 가야만 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미 흙을 접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오롯한 오솔길의 정취도 이제는 큰맘 먹고 일부러 찾아야 할 정도로 쉽지 않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바삐 가는 삶 속에서 기다림이 없어진 요즘, 휴대전화를 접고 묵혀둔 연필이나 만년필을 꺼내 아주 오래된 편지를 한번 써보는 것도 시간의 정확성과 실시간의 펀리함을 상징하는 지하철과 휴대폰이 점령한 이 땅에서도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거 외별님의 시를 감상합니다. 언제까지 계속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외별님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세련미에 있지 않습니다. 외별님의 시는 오히려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는 투박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외별님의 시는 사유의 폭이 넓고 여운이 있어 좋습니다. 이것이 읽는 사람인 제 취향과 맞닿아 있기에 더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몇 번씩 다시 꺼내 읽게 만드는 외별님 시의 매력이자 힘이 아닐까 합니다. 앞으로도 더더욱 정진하시어 더 좋은 작품 많이 쓰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