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하러 갔다가 통장 자르고 온날 "미용실 호갱썰"
동네에서 합리적인 미용실을 뚫는 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두 달마다 반짝하고 올라오는 새치에 큰돈을 들이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이사오기 전 내가 살던 곳은 서울 도심이지만 우리 동네만 'ㅇㅇ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적하고 고요했다. 학군 지라 그런지 아이들 키우기엔 최고지만 마땅한 밥집이라고는 없었고 그 거리엔 커피숍과 미용실이 주를 이루는 곳이었다. 전업주부지만 하루에도 스케줄 우선순위가 바뀌는 애둘맘인지라 머리 뿌염 따위에 예약을 해본 적이라곤 없었다. 최근 이사를 왔고 연이은 폭염에 더워서 머리를 묶으니 그새 흰머리가 파이팅을 외치며 무럭무럭 자랐나 보다. 반짝이는 흰머리가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집 주변 미용실을 검색해 당일 예약을 했다. 머리도 다듬고 싶고 뿌염도 해야겠고 상담으로 예약을 눌렀다
'음.. 첫 방문 할인이라 확장이전 전고객 30% 할인이라고?'
디자이너 선택이 관건이다. 첫 방문으로 누르면 랜덤으로 디자이너 지정이 되는 것 같은데 가능한 시간대에 디자이너를 보니 이제 막 디자이너가 된 직원과 원장급으로 보이는 직원이 있었다. 처음 가는 곳이고 고객평이 확인이 되는 원장급에게 머리를 맡기고 싶었다. 이게 화근이었을 줄이야. 전문가의 권위를 내세운 추천으로 거울 앞에 무장해제된 나는 무력한 상태에서 당하고 말았다
'아직 민생지원금을 안 썼으니까 오늘 써야겠다. 뿌염하고 머리 좀 다듬는다고 15만원을 넘겠어?' 원장급에게 머리를 맡기기로 마음먹고 마음속에선 비용에 대한 스스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며 등원을 시키고 예약시간에 늦지 않게 미용실로 달려갔다.
디자이너: 안녕하세요~ 고객님(호갱님) 오늘 머리 상담하신다고 하셨죠~
나: 네 제가 머리 뿌염만 계속해오면서 머리를 길렀는데 머리도 좀 자르고 뿌염도 해야 될 것 같아요
디자이너가 내 머리카락을 몇 번 들었다가 내린다
디자이너: 네 고객님 말씀처럼 뿌염만 하시다 보니 층이 생겨서 뒤쪽 머리가 지저분하긴 하시네요. 머리색이 많이 바래기도 했고요.
나: 정말요?(뿌염 티 안 나게 하려고 지금까지 미용실에서 뿌염을 했는데 왜 지저분하지..)
디자이너: 무엇보다 모발 전체가 붉은기가 있으신데 붉은색을 선호하시나요?
나: 아니요? 밑에 머리에 맞춰서 뿌염을 하다 보니 이 색 이던데요
디자이너: 요즘은 붉은색보다는 애쉬느낌을 많이 하세요. 고객님은 쿨톤에 가까우셔서..
쿨톤 웜톤 딱지 같은걸 얼굴에 갖다 댄다
주문을 외우듯 빠른 속도로 말을 해대는 탓에 머릿속은 버퍼링이 걸렸고 답변이 한 템포씩 늦어졌다.
디자이너: 애쉬톤으로 하기 위해 전체염색으로 톤다운을 해줄 건데 현재 고객님 모발이며 두피며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셔서 영양이랑 관리 같이 넣어드릴게요
나: 네~
디자이너: 커트비는 별도에 기장추가가 있는데 오늘 고객님 처음 오셨으니까 30%할인데 기장추가 안 받고 기본 금액으로만 해드릴게요
나: 네 감사합니다
디자이너 : 염색이랑 두피 영양 케어를 따로 하면 비싸니 패키지로 금액 묶어 드릴게요. 이 금액이세요!!
보여준 태블릿의 금액엔 15만원 정도가 적혀있었고(VAT별도) 여기에 커트비용을 별도로 내야 된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나: 네 알아서 예쁘게 해 주세요('어 차피 나에겐 민생지원금이 있어')
디자이너: 제가 예쁘게 해 드릴게. 머리 관리 쉽게 하는 팁도 마지막에 알려드릴게요
은근히 말을 놓는 게 친근감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직급에 대한 자신감이었을까? 그녀의 얼굴을 보니 나보다 적으면 7살~ 10살은 어려 보이는 얼굴이다. 그 순간 청담동 미용실에서 일했던 초등학교 친구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청담동에서 7년 동안 긴 스탭생활을 마치고 디자이너가 되었고, 단골고객이 없었던 신입디자이너라 친구들은 물론 그 친구의 친구들까지 직원가에 할인해 줬기에 마루타의 개념이 없진 않았지만 또 언제 청담동에서 이런 제품으로 머리를 만져보겠냐며 우리는 서로 상부상조하는 그런 시기를 보냈었다. 참 편했지만 친구였던 그녀도 결국 본인 매출에 급급한 미용사라는 걸 느낀 그날 이후로는 더 이상 머리를 하러 가지 않았고 서로에게 서운한 감정이 커져가며 자연스럽게 인연이 끊어졌다
미용사들 말투는 원래 다 저러나? 내 친구도 딱 10년 전 저랬는데..
'그냥 내가 어려 보이는 거겠지' 혼자서 기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염색까지 마친 후 샴푸를 하고 나오니 원장이 직접 두피마사지라고 해주는데 너무 시원찮아서 원.. 오히려 샴푸 해준 스탭의 손길이 더 야무지고 시원했다.
디자이너: 고객님 이렇게 층을 내드렸구고요. 집에 에어랩 있으세요?
나: 네
디자이너: 있으시구나! 그거 있으시면 머리 관리 정말 쉬워요. 매일 연예인 같은 머리 할 수 있어요
나: 저는 잘 안되던데요. 애들 때문에 머리 말릴 시간도 없고요
디자이너: 이렇게 4등분으로 나눠서 말리고.. 블라블라..
내 말을 들은 건지 어쩐 건지 본인얘기만 나부린다. 에어랩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스타일링하라는 건지 대꾸하기도 귀찮아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렸다. 어차피 애들 하원 후에는 머리를 묶어버릴게 뻔했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디자이너: 고객님 오늘 이렇게 해서 금액 21만 원입니다. 여기 네이버로 결제해 주시면 되세요
나: (놀라가슴 쓸어내리며) 아.. 저 카드로 결제하려고 하는데요 민생지원금 때문에요
디자이너: 그러시구나~ 그러면 카드 주시고요. 핸드폰 잠깐만 주세요. 뒷 머리만 영상 담았으니 리뷰 꼭 작성해주셔되세요.
영상을 찍었다고? 능수능란하다 이 능구렁이 같은뇬
나: 와 진짜 예쁘네요(드라이라는 함정)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디자이너: 일시불로 해드릴까요? 샴푸는 필요하지 않으시고요? 전체염색을 했으니 염색전용 샴푸 쓰시면 물도 덜 빠지시고 상한 모발에도 도움이 되실 거예요
나: 아.. 얼만데요?
마침 샴푸가 너무 안 맞아서 따로 하나 사려고 하기도 했던 터라 금액만 물어봤다
디자이너: 43,000원입니다. 같이 드릴까요? 트리트먼트는 안 필요하세요?
나: 샴푸만 주세요
디자이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두피케어를 하면서도 기분이 찜찜했는데 거절도 못하고 샴푸까지 사가지고 나오다니 '야이 바보 멍충아' 진짜 이불킥이다. 민생지원금 15만원에 내 돈 10만원을 더 썼네 나는 단지 커트와 뿌염만 하러 간 건데.. 왠지 모르게 분하고 어이가 없다. 누굴 탓하리? 거절 못하는 나를 탓해야지
그날밤 나는 남편에게 특단의 훈련을 받았다.
우리 남편의 이력을 잠시 말하자면 어느 곳에 가서도 허튼 돈은 단 1원도 안 쓰며 미용실 커트에 1만원을 넘긴 적이 없고(요즘 미용실 기본 커트가 17,000원임) 머리는 딱 필요한 것만 하고 나오는 사람이다. 일 특성상 시간에 맞춰 머리를 다듬어야 해서 처음 간 지역 일지라도 정확하게 자기 요구를 전달할 줄 아는 남자다. 첫 대화에서부터 느낌이 오는 건지 이 사람에게는 권유해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미용사들은 처음부터 "간단히 해드릴게요"를 외친다
미용실 거절 팁
생각해 볼게요라고 하지 말고 "오늘은 컷만 할게요"
두피케어 권유 시 "집에서 셀프로 하고 있어요"
제품 판매 시 "제품은 안 사요 괜찮습니다"
시간압박 만들기 "1시에 약속이 있어요"
경제적 한계설정 "이번달 카드 한도를 다 썼어요. 다음 기회에 할게요"
에필로그
디자이너: 고객님~ 회원권 결제하시면 정액권내에서 10~30% 추가할인 되세요. 30,50,100만원권 있습니다.
나: 오늘은 민생지원금 사용할거라 다음번에 올때 끊을게요
잘 빠져나왔다. 나는 다시 그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