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학년 교사의 시간, 일교시
학기초 수업시간이면 가끔 학생들에게 듣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은 왜 존댓말 해요?”
그럴 때면 나는 “네. 여러분은 존중받아야 하는 사람이니까요.”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존중’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물어볼 법도 한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간다. 자신들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두 안다는 듯. 그럴 때면 나는 구태여‘존중이란 이런 것이란다.’하고 설명해주려는 친절한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라포(공감대)가 형성되면 그때부턴 자연스럽게 말을 놓기도 하지만, 친해지고 나서도 공식석상(?)에서는 존댓말을 유지한다. 공식석상이라고 표현하고 수업이라고 이해하는 시간에 존댓말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어린이들을 존중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나도 어린이들에게 존중받기 위해서이다.
오래 전 심부름을 하러 마트에 간 적이 있었다.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골라 카운터에서 차례를 기다리게 되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어른에게 직원은 친절하게 “39,400원입니다.”라고 얘기하였고, 그 고객은 우아하게 카드로 계산을 하였다.
이내 차례를 기다리던 내 물건들이 바코드를 찍고 넘겨지자 직원분께서 나를 흘긋 내려다보더니“2,700원”이라고 짧게 얘기했다. 구깃구깃한 천 원짜리 세장을 내밀며 예민하고 소심했던 나는 그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고작 ‘입니다.’세 글자가 뭐라고.
그 뒤로도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혹은 어른이 되고도 간혹 나의 아이같은 목소리와 작은 체구로 인해 어린이 취급을 받았던 기억이 많다. 덕분에 교사가 된 지금까지도 나는 초면부터 반말을 한다던지,‘야.’처럼 내가 누군가에게 들었을 때 기분 나쁠 단어는 잘 사용하지 않게 됐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퍽 기분 나쁜 일인 것이다. 어른들에게 예의를 차려야 된다고 가르치면서 정작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는 것이니까. 이 얼마나 불공평한가.
종종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경우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아이들이 내가 부탁한 미션을 수행했을 때 “고마워요.”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 되고나서 발령이 났을 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어른들의 심부름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발령 첫해에는 아이들에게 물어볼 것도 많고, 이것 저것 부탁할 것도 많았다. “선생님 도와줄 사람 있나요?”하면 너도나도 손을 든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니 마치 내가 호의를 베푸는 것 마냥 줄을 세워 가위바위보를 하게 하기도 했다.
그날도 잔뜩 내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통신문을 각 반별로 배부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을 줄 세워 한 뭉치씩 전달하고 있는데, 가위바위보에서 이겨 내 심부름을 돕겠다던 솔이와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림 그리기 하고 싶다. 딴 친구한테 양보할까?”
“이따 하면 돼. 우리가 안 도와드리면 선생님이 힘드시잖아.”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심부름을 하는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베푸는 아량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는 10분의 꿀 같은 쉬는 시간을 단짝 친구와 놀기를 포기하고, 온전히 선생님에게 양보하는 미덕인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는 부득이 아이들에게 부탁을 하게 되는 모든 과정의 마무리에 꼭 “고마워요.”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이들의 물건을 빌려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게는 한없이 너그럽게 빌려주던 아이들도 본인의 학급 친구에게는 얄짤없다. 어쩌다 친구가 아끼던 볼펜을 만지면 도끼눈을 뜨던 아이도 내게는 먼저 내밀며 “선생님, 이거 버튼 눌러봐요. 반짝반짝 빛나요.”라며 선뜻 내미는 것이다. 이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호의라는 것을 안 뒤로 나는 아이들에게 꼭 허락을 구한다.
“선생님에게 이것 좀 빌려줄 수 있나요?”와 같은.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사는 어른이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세계에서 나는 조금 특별한 대우를 받는 어른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 그것에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것, 그리고 일말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내가 어린이 세계에 초대될 수 있는 어른의 자격은 아닐까. 그게 꼭 존댓말일 필요는 없다. 입가의 미소든, 따뜻한 눈빛이든, 고맙다는 말 한마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