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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Feb 22. 2024

특별한 생일

특별해서 좋은 건 없지만.....

나는 특별한 날 태어났다. 어렸을 땐 그래서 너무 좋았다. 큰 상을 앞에 두고 우리 아버지는 모든 순서가 끝나고 나면 내 이름을 불러 생일 축하한다고 하시며, 그 큰 상위에서 제일 먼저 먹고 싶은 것을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이 니 생일상이다고 농담을 하시면서 말이다.

"봄아! 그러고보니, 오늘이 우리 봄이 생일이네! 자~ 먹고 싶은 것 맘껏 골라봐! 우리 봄이는 평생 배곯는 일은 없을 것이여"


어린 시절 내내 생일 파티란 걸 가족들과 해본 적은 없었지만, 온 집안 식구들의 덕담과 칭찬으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 우리 엄마는 그 바쁜 와중에도 나를 위해 따로 미역국을 끓여주시곤 했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와 엄마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최고의 생일 선물이었던 셈이다.


그렇다! 나는 아침 햇살이 세상을 쫘악 비추는 설날 아침, 음력 1월 1일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태어났다.

온 가족들이 모여 하하 호호 즐거울 그날!

설준비만으로도 힘들고 고단했을 그날!

밥 한 끼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산통으로 힘들었을 엄마의 그날!

눈치 없이 그렇게 그날을 잡아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딸이라는 말에 몹시 서운해하셨단다. 옛날 분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이해하지만, 엄마를 통해 들었던 그날의 서러움은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래 그랬던지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아들 딸 구별 없이 우리를 아주 공평하게 대하시고, 그렇게 키워주셨다. 우리 집 안에서는 내가 여자아이라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빠나 남동생 사이에서 나만 특별히 소외되는 법이 없었다.


한때는 친구들의 권유로 양력으로 날짜를 바꾸어 생일파티를 열곤 했다. 그땐 생일을  핑계 삼아 친구들과 재미난 하루를 보냈다고 만족했다. 남의 생일 파티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그렇게 내게 생일은 친구들과도 챙겨도 그만 안 챙겨도 그만인 날이었다.


이렇듯 내 생일에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는 내가, 소소하게 내 생일 이야기를 꺼내게 된 건 올해 여든일곱이 되신 우리 시어머님 때문이다. 지금껏 22년 동안 한 번도 잊지 않고 내 생일을 챙겨주신 어머님께서 건네신 한마디에 마음이 울컥했고, 또 마음이 싸하게 아파왔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그해 설날에, 어머님은 조용히 안방으로 나를 부르셨다. 형님네는 시댁도 친정도 지척이라 점심을 먹고, 친정 간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 다음이었다. 결혼할 때 금반지 하나 못해준 것이 걸리신다며, 어머님께서 예전에 마련했던 건데, 이제는 손가락이 굵어져 들어가지도 안는다시며 금가락지 한쌍을 내게 건네셨다. 생일인데, 종일 식구들 뒤치다꺼리에 설거지하느라 애썼다고 하시며 말이다.

그 금반지가 우리 어머님께서 내게 주신 첫 번째 생일 선물이었다.


설명을 좀 하자면, 결혼할 때 우리는 결혼반지조차 생략했었다. 왜냐면 답답해서 그런 건 손에 못 낀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액세서리 자체를 별로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지 하지도 않을 예물을 돈을 들여가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님은 그게 그렇게 걸리셨던 모양이다.


그 후 매년 설날이면 차례를 다 지내고 점심까지 먹고 한가해지면, 나를 조용히 불러 준비해 두신 현금 봉투를 건네셨다. 생일인데  종일 일만 하느라 애썼다고 말이다. 그렇게 20년 넘게 어머님께서 건네시는 생일선물?일당(?!)마냥 받아왔다.ㅋㅋ


 철없던 며느리는 여전히 철은 덜 들었지만 중년이 되었고, 그 시절 쨍쨍하셨던 어머님은 그 기운이 세월 따라 많이 쇄하셨다.


올해는 아주버니댁에서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고,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우리 제비 아빠가 집에 가서 쉬고 싶다며 서둘렀다. 간밤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푼 것이 좀 무리였던가 보다.  큰집이 코앞이라 10여분이면 오가는 거리다. 나야 큰집서 놀다가 점심까지 먹고, 수다도 좀 떨다가 느지막이 오고 싶었건만.....

"자기야! 집에 먼저 가서 쉬고 있어! 나 더 놀다가 애들이랑 이따 점심 먹고 갈게!" 그 말을 그 다렸다는 듯이 어머님은 그러라시는데, 우리 제비아빠는 형이랑 형수도 피곤하실 텐데 쉬어야 되지 않겠냐며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그 한마디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뭐야? 나 어머님한테 생일 선물 받아야 하는데.....ㅋㅋ'


집에 와서 느긋하게 뒹굴 데며 쉬고 있는데, 오후 세시가 넘은 시간에 어머님께서 전화를 하셨 다. 형님네는 친정에 가고 어머님 혼자 계셨던가보다.

"뭐 하냐?"

"그냥 있어요. 어머니!"

"내가 너네 집까진 힘들어서 못 가겠고, 네가 저~기 까지 나올래?"

"왜요? 어머님! 뭔 일 있으세요?"

"아니, 내가 니 생일이라 용돈 좀 준비했는데, 그리 가서 못줘서..."

"아~ 괜찮아요. 어머님. 에이~ 안 주셔도 돼요. 하하하"

"아니다. 그리 안 하면 내가 서운해서 그래."

"하하하! 그럼 갈게요"


그렇게 어머님이랑 중간 공원에서 만나 어머님께서 건네주시는 금일봉을 받아 들었다. 안 주셔도 되는데, 잘 쓰겠다고 감사하다고 하며 염치없이 웃었다. 그런 내게 어머님께선 매년 주다 안 주면 내가 더 서운해서 그런다고 재차 말씀하시며, 앞으로 내가 몇 번이나 더 주겠냐신다. 이대로 건강하게 지내다가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잠자다가 그렇게 가면 좋겠다는 바람도 넌지시 건네셨다.


그 말씀이 너무 슬펐다. 갑자기 울컥 해졌다. 공원을 한 바퀴 도란도란 돌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냥 하시는 빈말이 아니라 생애 마지막 날을 그렇게 맞이하고픈 바람을 꼭 담은 말씀인것만 같아 더욱 그랬다. 자식들 고생 안 시키고 가고 싶다는 바람. 잠자듯이 그렇게 자다가 조용히 가고 싶다는 말씀.

어머님이 여든만 되셨어도 농담도 잘하신다고 웃어넘겼을 텐데..... 그냥 슬펐다. 물리적으로도 어머님의 시간이 그리 넉넉히 남아있지 않음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그랬을까?


하지만 할 말은 하는 철없는 며느리 또 어머님 말씀에 한마디 덧붙였다.

"어머님!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잠자다가 그렇게 갑자기 가시면 자식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어머님은 그렇게 가시고 싶으셔도 그렇게 가시면 안 돼요. 오동안 병상에서 자식들 힘들게 하는 것도 안 되겠지만, 건강하게 지내시다가 한두 달 정도는 아프다 가는 게 딱 좋은 것 같아요. 어머님은 꼭 그렇게 해주세요. 맘대로 할 수는 없지만요."


지금처럼 꾸준하게 몸관리 잘하셔서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해주셔야 한다고 나의 바람도 되뇌어 본다.

우리 어머님! 100세 시대에 100세를 맞이하는 우리 집안 첫 번째 주인공이 꼭 되셔야 한다고 소리 내어 주장해 본다. "아셨죠? 어머님!"


그 덕에 앞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어머님께 설날마다, 내 생일마다 금일봉을 선물로 받는 꽤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다. 하하하  


이런 마음, 이런 이야기도 이곳에 잔잔하게 일기를 쓰듯 기록해두고 싶다는 생각에 이 늦은 시간에 오랜만에 몇자 적어본다.


나이는 다 같이 먹는데, 부모님께서 드시는 나이는 차려드리고 싶지가 않다.

연로하신 부모님께는 더더욱.


2024년 2월 22일  새벽 두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잠못드는 늘봄......오랜만에 몇자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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