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분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마음이 아프다. 오랜 병상 생활로, 과거의 모습을 짐작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병문안에서 뵌 모습들과 달리,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고인의 모습은 항상 곱고 아름다운 모습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 모습은 장례식 자체를 비현실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작년 6월에는 예순넷이 되신 나의 작은 어머님을 먼 곳으로 보내드렸다. 백세시대를 이야기하는 요즘 세상에 그 나이는 너무도 이른 나이, 하늘나라 가기엔 아까운 나이였다. 그래서 마음이 무척 아팠다. 오랜 고생 끝에 이제 좀 살만하다고, 하시던 식당 한 3년만 더 하고, 다 정리해서 귀향하겠노라고 고향에 전원주택 터까지 마련한 시점이었다. 외동아들 결혼 시키고 한숨 돌리기에도 부족했던 시점에 재발한 암 덩어리는 순식간에 임파선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을 점령해 갔다.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채 일 년도 못 견디시고 그렇게 떠나가셨다.
그리고 얹그제 8월 18일, 나의 시댁 작은 어머님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올해 예순여섯이라고 했다. 지난 1월, 집안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꼼짝을 못 하시게 되었고, 요양병원으로 모신 지 6개월 만에 그렇게 가셨다고 하셨다.
어머님은 전화를 하셔서 그 안타까운 맘을 전하셨다. 자식같이 뒷바라지해서 결혼시킨 막내 시동생의 처이니, 그 안타까운 맘이야 말로 다 표현이 되겠는가. 자녀들도 다 장성해 일가를 이루고 제 몫 잘하며 살고 있는 마당에 저리 허망하게 젊은 나이에 떠나게 된 동서가 너무나도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올해 여든여섯 되신 어머님에겐 그 나이가 얼마나 한창때이겠는가.
두 분의 삶의 모습이 닮아 있었다. 막내아들로 철없이 자란 남편을 만나,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한 젊은 시절의 악착같은 생활력, 출가한 자식들, 이제 한숨 돌려 살만해졌을 때 찾아온 변고 같은 병마, 길지 않은 병상생활, 주변의 안타까운 시선들 그리고 죽음. 인생이 이렇게 허망할 수 있는가?
젊은 시절의 고단한 삶을 보상받듯, 이제 한숨 돌려 살만한 여유가 찾아온 시점에 그 여유 누려볼 기회조차 없이 저렇게 고통과 싸우다 가는 인생이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가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은 가족들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살다 보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때면, 삶이란 게, 살아간다는 게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들 그런 마지막을 상상하겠는가?
세상사는 모든 이에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남들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다들 그런 일이 당장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도 그렇다.
죽음은 나에게 먼 훗날의 이야기만 같다. 하지만 또 뉴스 속에서, 주변에서 만나는 다양한 모습의 죽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을 키운다.
산다는 건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가까이에서 죽음을 마주 대할 때면 이처럼 허망한 것이 없는 게 또한 산다는 것인 것만 같다. 어쨌거나 살아있으니, 삶이란 과제 앞에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것이 또 나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일 것이다.
열심히 살아보자!
잘 살아보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이 나를 나다움으로 이끄는 길이라 믿고 가자.
언젠가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를 즈음,
‘아! 그때가 왔구나! 지금이로구나’ 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를 희망해 본다, 죽음 앞에 악착같이 발버둥 치는 그런 삶이 아니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