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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종영 Feb 27. 2021

내 인생 최악의 정월대보름

2016년은 우리 가족에게 매우 뜻깊은 한 해다. '티끌 모아 티끌'이 일상이었던 우리가 첫 가족 여행을 떠났으니 말이다. 


부모님께선 항상 희생과 헌신으로 가족을 지탱해오셨다.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오셨고, 30여 년이라는 시간 나와 동생을 보살펴주셨다. 적은 벌이를 절약으로 극복하고자 하셨다. 당신들께서는 매일 다 낡아빠진 옷만 걸치시면서도 집에서 따듯한 밥 한 끼를 가족과 함께 위해 불철주야 일을 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함께 하는 날은 많지 않았다. 나와 동생 역시 부모님처럼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이러한데 가족여행? 꿈도 못 꿀 일이다. 외식조차 거의 하지 않는 집에서 가족여행이라니... 배부른 소리였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결핍에 대한 갈망은 없었다. 부족에 대한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누구보다 노력하시는 부모님을 보고서 어찌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오히려 없는 형편에서도 항상 금슬 좋은 부모님의 모습에 감탄할 뿐이었다.(만나신 지 한 달도 안 돼 결혼하셨지만, 지금껏 말다툼조차 하신 걸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엔 가족여행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 남들 한 번씩은 다 하는 것 같던데 왜 우리 집은 못 가는 걸까. 그래서 아름아름 열심히 모았다. 그리고 아버지 환갑 기념으로 첫 가족여행을 갔다. 아버지는 욕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치시기까지 하는 등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우여곡절이 많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에겐 잊지 못할 순간임에 분명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부모님께 다짐했다. 적어도 5년에 한 번은 꼭 가족여행을 가자고. 5살 터울이신 부모님을 보고 착안한 공약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5년마다 한 번씩은 우리 가족도 남들처럼 써보는 시간을 갖자고. 그렇게 약속하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다. 직업도 바꿔보고, 백화점이나 학교에 강의를 나가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책도 한 권 내봤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찾아오면서 지난 5년의 발자취는 먼지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책을 출간할 때부터 불안감이 엄습했다. 출간일이 한창 국내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 바람보다 훨씬 장기화돼버린 사태로 인해 난 모든 걸 잃었다. 강의를 여는 건 부담스러웠고, 자연스럽게 수입은 뚝 끊겼다. 가족여행을 포함, 이런저런 이유로 모았던 돈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복합적인 문제가 겹치며 부채는 쌓였고, 이를 타계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딱 30대 중반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30대가 어딨는가. 말 그대로 가진 것 하나 없는 상황을 맞았다.


아마 전국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나일지 모르겠다. 항상 바깥으로 맴돌며 살았었는데, 상황적으로 위축되다 보니 극단적으로 활동이 줄었다. 이 나이 먹고 집에만 있는 현실이라니... 


그렇게 2020년은 송두리째 날아갔고, 가족들과 약속했던 2021년이 찾아왔다. 심지어 어머니 생신은 음력 1월 15일 정월대보름이다. 그 사이 코로나 사태가 해결됐더라도 공약은 지키지 못했을 거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약속을 지킬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고민했다. 뭔가 의미 있는 이벤트라도 해드리고 싶다고. 내 앞날을 고민하는 것만큼 머리가 뜨거워지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마땅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찾아온 2월. 우리 가족에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고 말았다.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공장에서 코로나 집단 감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거의 200명에 가까운 직원 중 절반 이상이 양성 판정을 받았단다. 이제는 젊다고 하기 어려운 연세이신데 어머니께서 확진되시면 어쩌나. 숨이 턱 막혔다. 천만다행이었다. 함께 출퇴근하던 동료분들까지 양성 판정을 받았음에도 어머니께선 음성 판정을 받으셨다.


하지만 보건소로부터 2주간 자가격리를 권고받은 어머니께선 좁디좁은 방에서 나오지 못하셨다. 나머지 가족들도 집에서 마스크를 쓰고 자가격리에 동참하기로 했다. 검사자가 음성이라면 가족들은 의무 격리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가능하면 외로우실 어머니 곁을 지키기로 했다. 


결국 우리 집의 기둥 아버지를 제외하곤 모두 멈추기로 했다. 어렵게 얻은 직장 열심히 다니던 동생도 출근하지 않기로 했다.(병원에서 근무하기에 스스로 더욱 조심하는 편이다.) 본인 휴가를 다 반납하면서까지도 자가격리를 하며 어머니를 챙기겠다는 걸 보면서 대견했다. 나야 뭐... 지난 1년간 그랬던 것처럼 집에 머물면 되니...


난 어머니 역할 일부를 담당하기로 했다. 어머니께서 항상 하셨던 것처럼 새벽에 일어나 가족들 먹을 밥을 만들었다. (냄비밥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2~3일에 한 번씩 찌개나 국을 만들었다. 가족 식사를 책임지다 보니 어머니께서 매일 식사 준비를 하시던 게 다시금 경외심이 들었다.


그렇게 며칠 식사를 챙기다 불현듯 생각났다. 아뿔싸. 생각해보니 격리 2주면 어머니께선 생신, 그것도 환갑을 방에서 홀로 보내셔야 했다. 특별한 이벤트는 고사하고 너무 외롭게 생신을 보내셔야 했다. 그런 어머니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마음 표현은 미역국을 끓여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불효자식은 지금껏 부모님 생신 때 미역국 한 번 끓여드린 적이 없다. 자가격리와 역할 분담 덕분에 그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자취를 하면서 자주 했던 국이면 뚝딱 해냈겠지만, 미역국은 끓여본 적이 없다. 부모님께 해드린 적이 없으니 당연히 할 일이 없었다. 과정이 복잡한 건 아니었지만 여러 번 조리과정을 살펴봤다. 그리고 2021년 정월대보름 새벽, 미역국을 끓여 어머니 방문 앞에 놔드렸다. 어머니께선 마스크를 쓰시고, 심지어 일회용 장갑까지 끼신 채 잠깐 방문을 연 뒤 차려둔 쟁반을 챙겨 들어가셨다. 


어머니께선 식사를 하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난 그저 1주일 넘게 답답한 마음이 따듯한 미역국 한 모금으로 조금이나마 풀리셨길 바랐다.


어릴 땐 몰랐는데 어머니께선 가족들 생일날이면 생일상을 준비하시면서 꼭 발코니 쪽에서 당신만의 기원제를 지내셨다. 맑은 물과 함께 단출한 상을 차려 앞에 두고 우리 가족의 안녕을 비셨다. 누구에게 바람을 전하는지는 몰라도 가족들의 생일마다 어머니께서 하셨던 일종의 토속신앙(?)이었다. 올해는 그럴 수 없으시니 나라도 대신하고자 했지만 영 어색해서 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명색에 정월대보름 아닌가. 음력으로 올해 첫 보름달이 뜨는 날이니만큼 달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달을 보며 빌기로 했다. 그렇게 저녁이 찾아오고 난 달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달이 잘 보이는 날이었다. 집 근처에서 하늘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 그 어느 때보다 간곡하게 달님에게 부탁했다. 


이미 충분한 시련을 겪었으니 우리 가족에게 더 이상 난관을 주지 말라고. 그리고 이 막막한 시국 하루라도 빨리 끝내게 해 달라고. 


내일은 소고기뭇국이나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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