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온도를 낮추는 연습

by JIPPIL HAN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는 둘째 딸이 오랜만에 집에 들른다고 연락을 해왔다.
“엄마, 반찬 좀 챙겨줄 수 있어?”

보고 싶은 딸이 온다니 마음이 설렜다.

딸이 오는 시간에 맞춰 김치찌개, 계란말이, 고등어 구이까지 아이 좋아하는 반찬들로 저녁상을 차렸다.

‘오늘은 오랜만에 딸이랑 맥주 한 잔 해야지.’ 그 생각만으로도 입꼬리가 절로 올랐다.


하지만 집에 들어선 딸의 첫마디는...
“엄마, 나 오늘 새벽 4시까지 연습했어. 너무 피곤해서 빨리 가서 자야 돼. 반찬만 좀 싸줘.”

“어차피 밥은 집에서 먹을 거잖아. 여기서 먹고 가면 되지.”

“아 엄마~ 진짜 너무 피곤해. 그냥 집에 가고 싶어.”


그 순간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자취방이 네 집이 된 거니? 여기도 얼마 전까진 네 방이었잖아.’


그리고는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주책맞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딸은 놀라서 물었다.
“엄마 지금 울어?”

“알았어 알았어, 밥 먹고 갈게요…”


하지만 나는 이미 심통이 나 있었다.
“됐어. 빨리 가. 반찬 다 쌌으니까 집에 가서 밥 먹고 푹 자.”

딸은 내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가방을 챙기더니 문을 나섰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한 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엄마, 집에 잘 도착했어요. 엄마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밥 잘 챙겨먹고 자.”

그런데 정말 괜찮지가 않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예민할까. 나 왜 이러지?'


잠들기 전, 딸에게서 또 한 통의 메시지가 왔다.

“엄마 미안해. 요즘 새벽 연습 때문에 너무 힘들었어.
다음에 가면 같이 맥주 한 잔 해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저 그 한마디가 고마웠다.
딸의 사과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 짧은 대화가 나를 다시 숨 쉬게 했다.


요즘 들어 마음이 자주 달아오른다.
별일 아닌데도 서운하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딸이 연습으로 피곤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와 밥 한 끼 먹어주지 않는 게 서운했다.

그 마음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밀려온다.


감정의 온도가 예민하게 올라갈 때면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설다.
웃음기 대신 피곤함과 서운함만 잔뜩 묻어 있는 얼굴.


갱년기라는 말이 이제는 단순히 생리적 변화가 아니라
‘감정의 온도를 조절해야 하는 시기’라는 걸 느낀다.

예전에는 화가 나거나 슬픈 마음, 서운한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속으로 삼키고, 괜찮은 척하고, “나는 그런 사소한 일 따위에 절대 흔들리지 않아.”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그쳤다.

그런데 이제는 참는 게 강한 게 아니라 스스로를 더 다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억눌린 감정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모양으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감정이 올라올 때 그냥 한 걸음 조용히 물러난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거나 커피를 천천히 내리거나 그냥 조용히 앉아서 숨을 고른다.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다.
“ 지금 나는 화가 났구나.”
“ 나 지금 좀 외롭구나.”
인정을 하고 조용히 마음의 이름을 불러주면 마음이 이상하게도 부드러워진다.
감정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한없이 올라가있던 마음의 온도를 조금씩 낮추다 보면 삶의 온도도 함께 잔잔해짐을 알 수 있다.
세상이 갑자기 따뜻해지는 건 아니지만 내 자신이 조금 더 다정해진다고 할까?


갱년기는 분명 힘든 시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갱년기를 지나며 배우게 된다.

이 시기는 누군가와 싸우는 시기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내 몸과 내 마음과 대화하는 시간.

감정의 온도를 낮추는 연습은 결국 나 자신을 다독이는 연습인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 마음의 온도를 잰다.
뜨거우면 잠시 멈추고 나를 식히고, 차가워지면 스스로를 조용히 감싸 안는다.

그렇게 천천히 다시 나답게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워가는 것이 갱년기다.


‐다음회 계속-


* 다음화는 한주 쉬어갑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일주일간 혼자 여행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이 또한 갱년기 타파를 위한 일입니다. ^^

허한 마음을 채우고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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