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올해로 87세가 되셨다.
아빠는 타고난 주당에 호인에 쾌남으로, 친구가 셀 수도 없이 많으신, 지금으로 말하면 완전 '인싸'다. 지금 그 연세에도 (친구분들의 3분의 2가 다 돌아가신 지금) 동창회 회장을 맡아하실 정도다.
아빠는 젊은 시절 고등학교 생물선생님으로 학교에서 인기가 대단했고, 특유의 언변과 그림 실력 덕분에 여고생들에게 특히나 인기가 많으셨다.
업계에서도 인정을 받아 전성기 시절에는 '고등학교 모의고사 출제위원'도 하셨다. 모의고사 문제 출제할 때는 호텔에서 출제위원들과 같이 합숙도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80세 넘어서까지도 술을 잘 드셨고 그 연세에도 늘 건강하셨던 아빠였기에 가족들도 크게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아빠 인생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친구분들과 술 한잔 하시고 집에 오셔서 아빠 방에서 주무시다가 '변의'를 느끼시고 화장실에 가셨다.
변을 보셨다는데 그러고 나서는 기억이 없으시다.
우리는 새벽 3시경 부모님 집 가까이 사는 언니에게 전화를 받았다.
아빠가 119에 실려가셨고 아직 병명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건강하셨던 아빠 셨기에 우리는 너무 놀라 부랴부랴 분당 차병원으로 달려갔다.
엄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아빠는 화장실에서 변을 보시다가 실신을 하셨다고 한다. 변기가 피로 흥건했고 아빠가 엄마 방까지 겨우겨우 기어 오셔서 주무시는 엄마를 깨우셨다고 한다.
엄마는 너무 놀라셔서 아직도 손을 떨고 계셨다.
아빠는 대장내시경 검사 중이셨다.
몇 시간 뒤 결과가 나왔는데 병명은 '게실염'이었다.
게실염은 식도, 위, 소장, 대장의 약해진 장벽이 늘어나 꽈리 모양의 주머니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게실 질환은 대부분 대장에 발생하며, 특히 우측 결장에 잘 생깁니다.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대장의 동맥경화가 진행되어 탄력성이 떨어지고 혈관과 장관의 근육 사이에 틈이 생기고 차차 넓어지면서 발생.
출혈은 흔하지 않으나, 대량 출혈이 발생한다면 위험할 수 있으며. 직장 또는 항문 출혈의 형태로 나타남.
게실염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봤지만 그렇게 피를 쏟을 수 있는 병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아빠는 그 외에도 대장에 용종이 11개나 발견되어 조직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빠는 이틀간 병원에 계시다가 일단 퇴원하셨다.
그러나 조직검사가 나올 때까지 일주일간 가슴을 조리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우리를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 내 나이가 여든다섯,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나이다. 다만 네 엄마가 거동이 불편하고 신경이 날카로우니 나 말고 누가 네 엄마를 돌보겠냐.
내가 화장실에 실신했다가 겨우겨우 눈을 떴을 때, '아.. 이제 내가 죽는구나' 하고 눈을 다시 감았다. 그러다 문득 네 엄마가 생각났고 '안되지.. 내가 이렇게 먼저 가면 안 되지' 하고 정신줄을 붙잡고 필적으로 네 엄마한테 기어갔다"
엄마는 무릎, 어깨, 허리 수술을 하셨지만 수술결과가 전혀 좋지 않고 오히려 통증만 더해져서 하루에도 진통제를 몇 개씩 드셔야 하고 거동이 불편해서 아빠가 항상 손을 붙잡고 다니셔야 한다.
아빠도 연세가 많으셔서 운전이 안되시기 때문에 엄마 외출하실 일이 있으면 택시로 같이 데려다주시고, 엄마 볼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돌아오신다.
이렇게 매사에 손과 발이 돼주시는 아빠 덕에 자식들이 그나마 맘 편이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빠는 혼자 남겨질 엄마가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이신 것이다.
젊은 날 시부모님 간병으로 골병이 들어버린 엄마를 안쓰러워하고 애달파하는 아빠의 순애보인 것이다.
조직검사 결과 다행히 용종 11개는 선종으로 밝혀졌다.
아빠는 그날로 술을 완전히 끊으시고 하루 만보씩 걸으시며 운동을 하고 계신다.
'엄마'라는 아빠의 반쪽이 혼자 남겨지는 것을 걱정해 삶의 끈을 단단히 붙잡고 모든 질병을 이겨내시고 계신 것이다.
게실염 이후에도 2년간 아빠는 각종 질병(간농양, 폐렴)으로 입퇴원을 반복하셨다.
그러나 엄마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80 노인이 극복하기 힘든 질병들을 전부 극복해 내셨다.
아빠에겐 엄마가 '삶의 이유'가 되셨다.
오늘도 엄마아빤 손을 꼭 붙잡고 산책을 나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