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오빠는 드라마에만 있는 줄 알았다

by JIPPIL HAN

중학교 시절, 나에게는 지선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88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가수 이상은의 열혈 팬이었다. 같은 가수, 같은 노래에 열광하다 보니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 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붙어 다녔다. '숙제를 같이 한다'는 핑계를 대고 거의 매일 지선이네 집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우리 집보다 지선이네 집을 더 좋아했다.

우리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합쳐 일곱 식구가 북적였지만, 지선이네 집은 고요했고 한가했다.

그 집 특유의 평온함이 좋았다.


그 집을 드나든 지 며칠 만에, 나는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했다.
지선이에게는 나이 차이가 여섯 살, 네 살 나는 오빠 두 명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오빠가 지선이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고, 우리 귀염둥이 막내 있었네~”

그는 지선이 볼을 양쪽으로 꼬집으며 장난을 쳤고, 지선이는 늘 있는 일인 양 귀찮다는 듯 “아, 하지 마!” 하며 웃으며 뿌리쳤다.

잠시 후 둘째 오빠도 들어왔다. 그는 더 스윗했다.

“우리 지선이 왔네? 어, 지선이 친구야?”
“네.”
“지선이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오빠가 만들어 줄게.”


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 현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런 오빠가 현실에 존재한다고?’

나에게도 오빠가 하나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오빠란 놈은 맨날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나한테 떠넘기기 일쑤였고, 틈만 나면 나를 쥐어박았다.

그 인간이 군대 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3대 독자라 고작 6개월 방위였다.


그 이후로 나는 학교가 끝나면 거의 본능적으로 지선이네 집으로 갔다.

지선이 부모님은 맞벌이로 늘 바빴지만, 오빠들은 나를 지선이 처럼 챙겨주었다.

떡볶이를 해주고, 간식을 사주고, 여름방학이면 우리 집 형편을 눈치채고 가족여행에 나를 데리고 가주었다. 계곡, 바다, 산. 그들과 함께 있으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늘 집에서 긴장으로 굳어 있던 내 어깨가 풀렸다.

엄마의 지친 얼굴도, 심술 가득한 오빠 얼굴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사춘기였던 나는, 솔직히 그때 진심으로 바랐다.
‘나도 지선이네 집 식구였으면 좋겠다.’


내 안의 오빠에 대한 미움은 깊고 오래되었다.
명절마다 허리가 휘어져라 일하는 딸들은 칭찬 한마디 못 듣고, 오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따끈한 전과 송편만 집어먹었다.

할머니와 엄마 아빠가 3대 독자라고 오냐오냐 키운 탓에 그는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고, 예전에 주방 근처도 안 가던 사람이 이제는 주방에서 살다시피 하며 요리를 도맡아 한다고 한다니 기가찰 노릇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오빠가 별로다.

아마 그가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내 마음속 원망이 풀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지선이랑은 결혼 이후 연락이 끊겼지만 가끔 지선이의 오빠들이 궁금하다.

지선이 오빠들의 웃음소리, 계곡물소리, 그 바다의 여름 햇살까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반짝이고 있다.


어제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다가 문득 지선이 오빠들과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나 이렇게 다시 꺼내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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