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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소낙비 Jan 28. 2022

지방쓰는 법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여전히 헷갈려

이제 더 이상 큰집에 가질 않는다. 돌아가신 큰아버지집이였던 곳이나 장손인 사촌형의 아파트에서 이제는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도 않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간소하게나마 음력설날과 아버지기일에 제사를 집에서 준비한다. 가끔 집안 숙부님들, 사촌들을 보는 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할머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의 관들이 모셔져 있는 묘소에 가서 벌초겸 묘제를 지낼 때 뿐이다. 그렇게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억하는 집안의 제사와 만남은 각자의 이유로 뜸해졌다.


어린 시절 제사나 차례를 지낸다는 것은 맛난 음식을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과는 별개로 돌아가시기전의 할머니로부터 큰어머니로까지 음식의 분배권에 대한 미묘한 갈등속에 결국 어른들에게만 맛있는 조기랑 전들이 차려진 밥상을 멀찌기서 바라보며 입맛만 다셨던 일이었다. 삶은 달걀 하나도 아쉬운 시절이었다. 그나마 난 사내자식이라 가끔 어른들 곁에 껴서 맛을 볼 수나 있었던 어느 집안에나 있었을 법한 남존여비를 따지는 할매의 세상이었다.


"홍동백서","어두육미?"..조율..뭐시기뭐시기로 가끔 아버지랑 큰아버지는 실갱이를 해대셨다. 절을 어떻게 해야된다는 둥.."형님은 왜 제사지낼때마다 바뀌냐?"며 할머니의 자식, 6형제들중 유달리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제사나 명절에서의 형식과 절차를 나름 강변하시곤 하셨지만 지방을 쓰는 건 언제나 큰아버지 차지셨고 그 역시 언제나 작은 골방에 들어가셔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시곤 의기양양하게 한자로 쓰인 지방종이를 제사상 머리맡에 놓인 병풍앞에다 밥풀로 붙이셨다.


'현(顯)'자부터 헷갈린다. 나름 대학시절부터 언론사준비를 하면서 꽤 많은 한자랑 고사성어를 외워서 중국에 출장가서도 한자 몇 글자로 필담을 나누거나 거리에 씌여진 간자체쯤은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이지만 집에서 지내는 명절과 아버지기일엔 항상 스마트폰을 찾아봐야 한다. 물론 작은 아버지집으로 모셔온 할머니, 할아버지제사때에 사촌은 한글로 지방을 쓰기도 했으니 뭐라도 쓰는게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헷갈려서 찾아보는 스마트폰과 글쓰기를 위해서 검색해 본 '지방쓰는 법"에서는 심지어 우리제사닷컴이라는 사이트에서 상세하게 제사에 관련된 온갖 정보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옛날 큰아버지가 의기양양하게 적으셨던 지방쓰는 비법이 오래전 시외버스를 타면 팔았던 조그마한 책자속의 '생활정보집'이었음은 혼자 큰집 골방책상을 뒤적거리면서 알게된 그 시절 나만의 비밀이었다.


이제 며칠있으면 음력설이 다가온다. 우리식구들은 나름 간소하지만 먹을 만한 음식들을 차려놓고 병풍대신 티비속 화면에 병풍사진을 올려 차례를 지낼 것이다. 엊그제 출장다녀오면서 아버지의 남은 재가 봉안된 납골당에 들러 생전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커피 한 캔을 가져다 놓았다. 더이상 제사를 지내면서 조상님들에게 로또번호를 알려달라거나 국회의원정도의 벼슬이라면 명당에 산소를 써야한다는 구시대 토템적 사고방식으로 MZ세대들과 소통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50을 넘긴 내가 봐도 죽은 공자가 섬긴 당시의 시대적 형식과 절차가 '신위봉안'하고 '초헌...아헌' 뭐 이런 요상한 단어로 남겨진 제사문화, 고려말 타락한 불교를 뒤엎고 새시대를 열겠다는 정도전의 야망찬 유교적 청렴과 자기수양등이 내용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은 꼴이다. 물론 아직도 내고향 경북에선 씨알도 안먹히는 불효막심한 상놈소리이기도 하다.


생선대가리를 이쪽으로 하면서 배를 어느 쪽으로 놔아야하나 항상 헷갈리지만 이제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는다. 그냥 내 맘대로다. 엎드려 절 할때도 그냥 나와 우리 가족들이 같이 맞춰서 한다. 누가 뭐랄 사람도 없다.

그나마 아내가 아버지를 기억하고 나름의 정성으로 전을 부치고 생선을 구워주는 걸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게 나도 나중에 이런 저런 헷갈리는 절차와 한자로 적혀진 지방이 없더라도 우리 애들에게 그저 기억되어지는 아빠였음한다. 커피를 사랑하는 아빠로...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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