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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Sep 13. 2023

명자, 아끼꼬, 필자

필자는 여자 이름인데

  초등학교 시절 수리조합(후일 토지개량조합으로 개칭) 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아버님 방에는 키 높은 목제 책상이 있었다. 가끔 그 책상에서 큰 누님이 보던 책이나 월간지를 뒤적거리다 보면 '필자'라는 이름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필자'는 책이나 잡지에서뿐만 아니라 누님이 오려 둔 신문 기사에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특히 자전적 이야기, 르포(Reportage), 여행기, 사진 및 기획 탐방 취재 등의 기사에서 필자란 이름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나라에는 '필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참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신문, 잡지 등의 게재된 기사와 단체 사진이 게재되면 사진 아래에는 반드시 왼쪽 또는 오른쪽 혹은 앞줄 오른쪽에서 몇 번째가 '필자'라는 설명이 동그란 점선이나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필자'는 분명 여자 이름인데 사진 속의 표시된 인물은 대부분 남자이기에 "무슨 남자 이름을 여자 이름처럼 지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 많은 철수, 영수, 창수 같은 이름이나 요즘 신문 기사에 많이 오르내리는 흥민, 민재, 강인처럼 누가 봐도 남자임이 분명한 이름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 여자 이름처럼 '필자'로 지었을까 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동급생이나 누님 친구 중에 ‘명자, 숙자, 말자’처럼 '자'로 끝나는 이름이 많았기에 당연히 필자는 여자라 생각했으나 정작 필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은 주위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참 후에야 그 뜻이 글쓴이, 필자(筆者)를 말하는 것이고 여자 이름에 ''가 많은 것이 일제 36년 하의 ‘일본식 이름 강요’의 산물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왜 이리 많을까?” “왜 남자에게 여자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주위에 ‘자’로 끝나는 여자 이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옆집 할머니가 집에서 일하는 누나를 부를 때, 늘 '자야' 또는 '자야, 어딨노?'라고 큰 소리로 부르던 것을 담 너머로 자주 들었다. 그 누나의 이름은 ‘경자’였다. 그러나 ‘자야’는 경자 누나만의 ‘자야’가 아니었다. 앞집, 뒷집, 옆집 등의 이웃집에 보통 한 명 이상의 ‘자야’가 있었다. 그 시절 어른들이 딸이나 이웃 여자아이를 부를 때 이름을 다 부르기보다 ‘숙’으로 끝나는 이름은 ‘숙아 또는 숙아야’, ‘희’로 끝나는 이름은 '희야'라고 불렀다. 


  여자 이름에 아들 ‘자’를 붙인 것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동양의 남아선호사상 때문인가라는 생각만 했을 뿐 여자 이름에 아들 '자'를 붙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한자 '자'는 일본식 발음으로 '꼬(코)'로 읽힌다. '아끼꼬' '하루꼬' '마사꼬'는 '명자'明子 '춘자''春子 '정자'正子'의 일본식 발음이다. 일본에서 여자아이의 이름에 '자'가 많은 이유가 子를 분리하면 一과 了(마칠 료)가 되므로 숫자 1에서 끝까지 인생을 완성할 수 있다는 뜻과 "사랑스럽다" "아이를 출산한다" 등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이름을 지을 때 선호했다는 것은 성인이 되고 난 다음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 여자아이 이름에 많이 쓰인 것으로 ‘자’ 외에 '희' '숙' '순'이었다. 한자로 ‘계집 희, 맑은 숙, 순할 순’의 뜻을 가진 이름으로 작명하는 것은 여자임을 나타내거나 또 여성스러움과 성품이 맑고 온순하길 바라는 그 시절 부모님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드문 경우이나 필자라는 이름의 여성도 오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한 명 있기는 했다. 이름은 태어나기 전, 후에 지어져 타인과 구별되고 사는 동안 그 이름으로 불리다가 죽은 후에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대신한다. 태어난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야 동서양이나 고금(古今)인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러기에 태어난 자식에게 그런 바람이나 기대를 담은 좋은 이름을 짓는데 신중하며 고심하는 것이리라.  

   

  요즘은 여자아이 이름이 '자'로 끝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때, 순우리말로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것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 빛나, 가람, 한별, 누리 등이 순수한 우리말 이름이다. 이미 성인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기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나 관련한 기사를 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지금도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 이름을 가진 아이들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의 관례나 혈족 간의 항렬에 따라 이름을 짓거나 시대의 흐름에 따른 이름인들 어떠랴. 자식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을 했던 그때의 심정으로 자식을 양육하고, 그런 부모의 마음과 기대에 부응하는 자식이 되기 위해 노력함이 서로 어우러질 때 이름을 지어주고 부여받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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