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를 왜 받아야 하는데?
캐나다 초등학생들이 그린 컈나다 학교 그림과 한국 초등학생들이 그린 한국 학교 그림을 보면 항상 나타나는 차이가 하나 있다. 캐나다 아이들은 땅을 초록색으로 그리고, 한국 아이들은 황토색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캐나다 학교의 웬만한 땅은 다 잔디밭 (물론 잡초가 많기는 하지만)이고 관리도 늘 하는 편이라 땅을 보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 축구도 운동장이 아니라 잔디밭에서 한다.
잔디를 관리하는 건 땅을 관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여유가 필요하다. 시간이든 노력이든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로 캐나다의 초등학교 교실에는 여유가 보인다. 선생님 한 명당 담당하는 학생이 적어, 어떤 경우에는 두 학년을 한 반에 놓고 가르치기도 한다.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뭐, 캐나다 교과과정을 따라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도 적어도 학업 면에서는 거의 없다. 굳이 학업 경쟁이 있다면 아시아 학생들끼리 하는 것이고, 한국인과 중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은 나름 경쟁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살던 지역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캐나다 학교는 내 경험상 학업 경쟁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여유를 가지고, 공부하는 시간만큼을 악기와 체육 활동에 쓰는 것을 보면서 만족스럽기도 했다. 땅을 황토색으로 그리던 내 아이들이 점차 땅을 초록색으로 그리게 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좀 덜 메마르게 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고 보니 어, 뭔가 하나 빠졌다... 싶은 것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간절함과 절박함이었다.
캐나다에서는 굳이 위로 올라 가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위에 있는 떡이 그렇게 크지도 않아서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측면도 있다. 아들이 근무하는 회사에서도 승진하면 받게 될 보상 대비 맡게 될 일의 양이 많다고 생각해서 승진을 거부하고 말단으로 근무하는 직원들이 있다고 한다. 일을 너무 잘해서 오히려 상사들이 일 막힐 때 가서 물어보는 전문(?) 말단들이다.
게다가 일자리가 없어도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은 없도록 제도가 마련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다. 자원이 풍부해서 나라가 여유가 있으니 그 여유로움이 국민들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글쎄, 나 같으면 백 원을 더 받고 한 시간을 더 일하더라도 일단 승진을 거부하지는 않았을 거다. 승진은 그 자체로 사회적으로 보여주는 능력의 척도 아닌가. 그런데 캐나다는 그런 보여주기가 없다.
한국의 대기업 임원을 하시다가 캐나다에 와서 여행 가이드를 하시는 분께서도 여행 가이드의 삶이 너무 좋다고 하셨다. 누구나 먹고 살 길이 있고, 대부호가 아닌 다음에야 무슨 직업을 가졌든 별 차이없이 먹고 살기 때문에, 서로 남의 직업에 별 관심이 없고, 하는 일이나 버는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위로 올라가려고 아둥바둥 하지 않아도 되어 너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로스쿨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Osgoode Hall Law School에는 한인학생회가 있었는데, 한인학생회의 오랜 소원 중 하나가 한인 중에서 메달리스트를 내는 것이었다.
캐나다의 로스쿨들은 졸업시에 학점이 높은 3명에게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수여하는 곳이 많다. 나름 날고 기는 로스쿨 동기들 사이에서 이 상을 받은 사람들은 보통 법원 판사 밑에서 연수 생활을 한 뒤 대형 로펌에 스카웃되는 소위 엘리트 코스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직 한인 중에서 그런 사람이 없었던 거다. 그리고, 로스쿨에 와서까지 한인 학생회를 결성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부모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학생들이라, 한인 학생 중에서 메달리스트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던 거다.
그런데, 내 두 윗 기수였던 한인 로스쿨 학생이 1학년의 모든 과목을 A+와 A로 마무리를 했다. 평균이 B인 로스쿨에서 대단한 일이었다. 야, 이제 기회가 왔구나! 이 녀석이 이 학점만 유지하면 한인 중에서도 메달리스트가 나오는구나! 선배들은 기대에 부풀었다고.
하지만, 거의 2세였던 이 학생은 그런 메달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좋은 로펌 들어가려고 1학년 때 죽어라고 공부한거야. 로펌에 들어갈 때는 1학년 성적만 보여주면 되는데, 왜 2학년, 3학년때도 그렇게 죽을 듯이 공부를 해야 해?
그래서 그는 2학년 부터 공부에 손을 놓았고, 대형 로펌 입사가 확정된 3학년 때에는 D를 받고도 신경쓰지 않았다. 물론 그는 너무 좋은 로펌에 입사해서 지금도 좋은 대우를 받고 산다.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된다 - 그게 캐나다에서 교육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인 듯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간절함이 생길 리 없다. 나누어 가질 것이 넉넉하다고 생각하면 무엇하러 절박하게 살겠는가. 내가 24평에 살든 48평에 살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니 내가 필요하지 않다면 굳이 집 평수를 늘릴 이유가 없고, 내가 교수를 하든 택배를 하든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니 굳이 적성에 맞지 않는 자리를 노릴 이유도 없다.
어찌보면 좋은 점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인인 나는 아쉽다. 더 나아갈 길이 있는데도 아이들이 자꾸 멈춰설 때 아쉽다. 왜 캐나다는 간절함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 아쉽다. 절박해야 했던 1세로서는 왜 1.5세들이 벌써 부모의 간절함을 잊었는지 아쉽다.
아이들이 적당히 타협할 때마다 나는 기꺼이 꼰대가 되기로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전하는 절박함의 메시지를 천박함과 동일시 하는 느낌이니 소용이 없다. 1세로서 타국에서 견뎌낸 'visible minority'의 삶을 이해시킬 방법이 없으니, 간절하라는 메시지는 타격감이 전혀 없다.
그래, 적어도 너희들이 캐나다에 있는 동안에야 무슨 문제가 있겠니. 그러니, 이제는 그저 바랄 뿐이다 - 너희들이 간절함과 절박함을 느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너희들에게 봄 날의 햇살만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