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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Dec 06. 2022

20cm의 불안감, 5mm의 불쾌감

뻔뻔함의 미덕

캐나다에 온 후 자꾸 생각나는 한국의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화장실이다.  


한국의 화장실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꽤 높은 수준의 privacy를 보장한다. 전후좌우가 빈틈없이 꽉 막혀 있고 문과 기둥 틈새도 웬만하면 틈을 막는 재질로 가려 놓아 밖에서 화장실 안의 상황을 가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람들로 우글대는 한국 회사에서 내가 짧은 시간동안이라도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나만의 공간이었다.  


캐나다의 화장실은 다르다. 일단 문 아래쪽 20cm정도가 공간으로 남겨져 있다. 화장실 앞에 있는 사람의 구두가 보인다. 그 공간으로 내가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불안하다. 변기에 앉으면 자고로 마음이 편안해 지는 안정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마음의 편안함이 없다.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공간이 확보되지 않아서다.  


그 뿐이 아니다. 문과 기둥 사이의 틈새도 따로 막혀 있지 않다. 5mm 정도 밖에는 안 되는 틈이지만 (넓은 곳은 1cm정도 되기도 한다), 그 틈을 통해서 문 밖에서 무의식적으로 슬쩍 보아도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금방 알 수 있고, 같은 층에서 일하는 사람끼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그 작은 틈을 통해서도 지금 변기에 앉아있는 것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의 얼굴이 그 틈을 향해 있는 것 만으로도 불쾌하다. 그래서 겨울에는 코트를 가지고 가서 문 틈에 걸어 틈새를 가리고 했지만, 그것도 한 두번이다. 화장을을 가는데 외투를 입고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에 TV에서 중국의 화장실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문이 없었다. 문이 없는 화장실이라니. 황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앞에서 누가 빤히 지켜보고 있는데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전쟁 포로를 모아 놓은 수용소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인데. 그런 상태에서 일을 보는 것도, 그걸 지켜보는 것도 참 뻔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캐나다의 화장실과 중국의 시골 화장실이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문 처럼 생긴 것은 있지만, 누가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문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북미의 뻔뻔함은 아닌 척 할 뿐이지 사실 중국과 별 차이가 없다 싶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 불안함과 불쾌감을 참아내는 능력이, 혹은 그 상황을 불안해하지도, 불쾌해하지도 않는 뻔뻔함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국제적 능력인지도 모른다. 뻔뻔함과 창피함이 만났을 때는 뻔뻔함이 승리한다는 걸 나는 한국에서도, 캐나다에서도 여러 번 목격했다.


요령 부린 것을 들켜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연줄 인사임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런 뻔뻔함은 상황을 막론하고 당당할 수 있게 하는 기본기인지도 모른다. 당당함은 내가 부끄러워해야 하는 마음과, 그 마음과 상황을 무마하려는 시간과 노력을 불필요하게 만드니, 매우 효율적이다. 과거를 돌아보며 이불킥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생각처럼 쉽게 뻔뻔해지기 어렵다는 거다. TV에서 늘 보는 것이 뻔뻔함이라 쉽게 배울 줄 알았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고객을 만나도, 사업처를 만나도, 나는 체면과 상대의 체면을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화장실 문 밑 20cm의 공간이 불안하고, 문 옆 5mm의 공간이 불쾌하니, 뻔뻔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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