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와 본질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있다. 쓰임새는 다양하지만, 이 말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고추는 매워야 하고, 매운 고추가 좋은 고추라는 거.
아마도 예로부터 날로 먹든, 고춧가루로 빻아 먹든, 고추장을 담가 먹든, 김장에 사용하든 간에 고추는 자고로 매워야 제 맛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사실 고추의 진가는 매운 맛에 있지 않고 단 맛에 있다.
고추가 달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가 즐겨먹는 과일들은 보통 단 것들이다. 배 중에는 신고, 사과 중에는 후지 (부사), 포도는 캠벨얼리가 내가 한국에서 주로 먹던 과일이었다. 당도는 Brix라는 기준으로 표시하는데, 높을 수록 당도가 높은 것이다. 잘익은 신고의 당도는 약 11 Brix 전후, 후지는 14 Brix 전후, 캠벨얼리는 15 Brix 전후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추의 당도는 품종별로 차이는 많지만 보통 12-16 Brix 전후다. 우리가 흔히 보는, 우리나라에서 기르는 고추들은 과일 못지 않은 단 맛이 있다는 뜻이다.
날 것으로 먹든, 고춧가루로 빻아 먹든, 고추장을 담가 먹든, 김장에 사용하든 언제나 제 맛을 내 주던 고추의 비밀은 매운 맛에 있지 않고 그 단 맛에 있다.
우리가 고추에서 단 맛을 느끼지 못하는 건 매운 맛 때문이다. 하지만, 혀로 느끼지 못해도 달지 않으면 제대로된 고추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고추의 가치는 단 맛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렸을 때는 고추, 고추장, 고춧가루 같은 매운 음식 재료는 한국 사람들만 쓰는 줄 알았다. 나중에 외국인들과 거래도 하고 해외 출장도 다니다 보니, 동남아시아나 남아메리카에서도 고추 종류를 먹고 있었고, 심지어는 한국 고추보다 더 매웠다.
하지만, 이런 고추로 고춧가루를 만들고, 고추장을 만들고, 김치를 담글 수는 없다. 스리라차 소스를 만들고, 쁘릭 남쁠라 소스를 만들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고춧가루, 고추장, 김치에 사용될 수는 없다. 이런 용도로 사용되려면 매운 맛 못지않게 높은 수준의 단 맛을 보유해야 한다.
단 맛이 빠진 고추는 김장에 쓸 수 없다는 것, 고추의 본질은 매운 맛 뿐만 아니라 과일을 압도하는 단 맛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제대로 된 고추를 키울 수도 있고, 고를 수도 있다.
가끔 우리는 성취된 것의 단면만을 보고 판단한다. 김장에 널리 쓰이는 고추라면 아, 맵겠구나, 한다. 김장을 담들 수 있는 고춧가루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매운 맛만 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멕시코 고추, 베트남 고추로 김장을 담그게 된다. 그리고는 대체 왜 김치 맛이 나지 않을까 의아해 한다.
고추 뿐이랴. 한국이든 캐나다는 요즘은 어딜 보아도 매운 맛, 매운 맛 한 가지만 보고 좁은 시야로, 외길로 달려가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는 맛있는 김치가 없다. 매운 맛은 단 맛이 뒷받침이 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아야 값 있는 본질을 잃지 않은 고추가 되고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