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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Aug 27. 2023

영어가 잘못했네!

뻔뻔함 예찬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영어에 뻔뻔스럽지 못하고 그래서 영어 습득이 더디다고 한다. 잘 못된 영어 문장을 말하거나, 잘 못된 발음으로 말하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보다 더 부끄럽게 여기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더 영어가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한국인인지라 틀리게 말하는 것이 아주 많이 창피했다. 로스쿨이라 더 문제였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고만고만한 동료들 사이에서 외국인 보스를 모시고 영어로 업무를 하는 거니 할 만 했지만, 스스로 한 영어 한다고 자부하는 로스쿨 동기들이나, 언어야 말로 변호사의 무기요 최후의 보루라 말씀하시는 교수님들 앞에서는 한 없이 초라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아,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업무상 한국에서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인식을 의식하고 살던 습관 때문인지, 로스쿨에 입학해서 내 영어의 부족함을 공개해야 할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40년간 스트레스라는 걸 모르고 살았었는데, 언어가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는 건,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클 수 있다는 건 몰랐다. 


만일 다른 길이 있었다면 일찌감치 포기했을 거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니, 길은 있었을지 모르나 새로 다른 길을 모색하기에는 일단 충분한 시간이 (그 당시 계획된 일정으로는) 없었다. 


그래서 학기 초에 나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어떻게든 영어를 못하는 것을 안 들키려면 말을 안 하는 것이 상책이었으니 말이다. 쓰는 거야 수 십번이라도 고쳐서 제출할 수 있으니 말만 안 하면 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피하고 미리 대비해도, 피할 수도 없고 준비한 말로는 때울 수 없는 순간들이 생겼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내 영어가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동기들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다 까발려지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영어를 잘 하는 척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마음을 얼마나 편안하게 하던지. 1학기 후반부에는 좀 틀리게 말해도 부끄럽지 않았고, 동기들도 교수님들도 그러려니 하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영어에 대해 충분히 뻔뻔해졌다고 생각했다. 한국인이 흔히 겪는 L과 R의 문제 정도는 그냥 알아 들을 때 까지 반복해 주거나, 써서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참, 별 것도 아닌 걸로 괜히 고민했네. 그렇게 생각했다. 영어 발음에 대한 트라우마는 벗어던진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미시 경제와 거시 경제에 대해 말을 하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나의 Macro와 Micro 발음을 분간하지 못하는 거다. 


순간 예의 그 트라우마가 솟아올랐다. 아니, 어떻게 "마이크로"와 "매크로"를 구별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한 대 맞으니, 갑자기 뻔뻔함은 사라지고 예의 그 소심함이 시작되었다. 문장에도 발음에도 자신이 없어져서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인 2세 로스쿨 학생 한 명에게 영어 conversation 과외를 받고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물어보니 macro는 입술에 힘을 주고 입술을 옆으로 쫙 찢어서 "매크로"라고 하면 혼선이 없었다. 해법을 들어 해결하고 나니, 아 별 것 아니었다 싶었고, 그렇게 나는 다시 뻔뻔함을 되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12%"라고 말한 것을 동기들이 "3%"로 알아듣는 사건이 있었다. 아니, 아무리 내 발음이 나빠도 그렇지 "트웰브"와 "쓰리"를 어떻게 혼동한다는 말인가. 다시 멘붕이 왔고, 뻔뻔함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한 후에 나는 다시 뻔뻔해졌다. 


그 뒤로도 그런 일은 많았다. First와 Fourth, Stanford 와 Sandord, 혼선이 있을 때마나 나는 소심함과 뻔뻔함을 오가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뻔뻔함은 겪을수록 커져만 간다는 것을.


그래서 로스쿨을 졸업할 때 쯤 나의 뻔뻔함은 이제 이 경지에 이르렀다. 


영어가 잘못했네! 


너무 뻔뻔하다고? 그래도 이제는 음성 인식 기계들도 내 발음을 무리없이 다 알아들으니, 좀 뻔뻔해도 괜찮을 듯 싶다. 어쨌거나, 1세가 뻔뻔해지지 않고 영어권 학교에, 영어권 사회에 자리잡을 방법은 전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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