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로스쿨 학점은 언제까지 써 먹어야 하는 거야?
로스쿨은 학점이다.
다른 건 필요없다. 입학할 때도 대학교 학점과 로스쿨입학자격시험 점수가 대부분의 결과를 결정하고, 로스쿨을 다니는 동안에도 보여줄 건 학점 밖에 없다. 물론 학외 활동도 보기는 하지만, 학점이 뒷받침 되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로스쿨 학생들을 채용하는 로펌들도 학점과 fit, 두가지를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Fit이란 해당 로펌과의 궁합이다. 이건 면접과 학외 활동으로 판단을 받는다. 하지만, 학점이 좋지 않으면 면접의 기회는 잡을 수도 없다.
학점은 거의 대부분 기말 고사 성적으로 정해진다. 리포트나 발표가 반영되는 경우도 있지만, 비중이 크지 않다. 시험을 잘 볼 자신이 있다면 수업에 안 들어와도 된다.
내가 다니던 로펌의 고위 변리사 한 명은 변호사 자격을 따고 싶어서 오타와 대학 로스쿨에 등록은 했으나, 수업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로펌에 일하던 학생 중에 오타와 로스쿨 학생이 있어서, 그 학생을 통해 족보를 구해 공부하고, 기말고사만 치고, 평점을 넘는 좋은 학점을 받고, 그렇게 졸업장을 따고, 변호사 자격시험을 통과해서, 파트너 변호사가 되었다.
이 사람이야 이미 직장이 있으니, 졸업장만 따면 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학점이 모든 일의 발판이다.
그러니, 다들 좋은 학점 받기에 혈안이 될 수 밖에 없다. 일단 로스쿨 졸업에 족히 1억원은 바쳤으니, 그리고 내 몸 값이 학점에 달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궁금하다.
도대체 학점 관리는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어떤 졸업생은 1학년 성적만 잘 받으면 된다고 하고, 어떤 졸업생은 3년 내내 신경써야 한다고 하고. 나도 참 궁금해 하면서, 하지만 요행에 기댈 수 있는 처지는 아니기에, 힘들게 3년을 성적관리에 힘썼더랬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답은 하나가 아니었다.
일단 1학년 성적은 무조건 중요하다. 대부분의 북미 로스쿨에서는 1학년 때 배우는 과목이 비슷하다. 그리고 선택 과목이 거의 없고 대부분의 수업이 필수 과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1학년의 학점은 마치 한국 학력고사나 수능과 같은 효력을 인정받는다.
1학년 성적이 로스쿨 학생의 보편적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게 1학년 학점으로 취직이 결정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래서 북미의 많은 중대형 로펌들은 2학년 1학기에 로스쿨 학생들로부터 입사 원서를 받고, 그렇게 1학년 때의 학점으로 2학년 여름방학의 인턴 채용을 결정한다. 그리고, 2학년 여름방학 때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그 인턴들이 그대로 졸업 후 연수 자리를 제안받게 되는데, 연수 자리를 제안할 때에는 학점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루트로 취칙이 되는 로스쿨 학생들은 1학년 이후의 학점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1학년 학점이 좋을 수는 없다. 로스쿨은, 적어도 캐나다에서는, 철저하게 상대평가와 정규분포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1학년 성적으로는 중대형 로펌의 오퍼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학점 관리를 해야 한다. 졸업 후에라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그래서 어느 정도 고수익이 보장되는, 그런 로펌에 지원해서 합격되기를 바란다면, 3년간 속된 말로 빡세게 성적 관리를 해서 높은 평점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런데, 1학년 학점이 너무 나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2학년, 3학년때 학점을 잘 받아도 만회할 수 없는 1학년 학점을 받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때는 일반적으로 평점보다 성적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학년보다 2학년, 2학년보다 3학년의 학점이 더 좋아졌다는, 내가 처음에는 로스쿨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나, 3년의 시간동안 충분히 적응을 마쳤다는, 그런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그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3년을 꼬박 바쳐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 로스쿨 학점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대학 학점으로만 뽑는 대형 로펌들이 있다. 캐나다 지적재산권법의 성지라고 하는 오타와에 있는 지적재산권 전문 로펌이나, 지적재산권법 파트가 따로 있는 로펌들이 그렇다.
이 로펌들은 (대부분 캐나다 전역에 지사들이 있지만, 이 루트는 오타와에 있는 사무실에만 적용된다) 로스쿨 일정이 9월에 시작된 지 두 달도 채 안 된, 중간고사도 치르지 않은 10월 말 경에 캐나다 전역에서 1학년 학생들로부터 원서를 받는다.
왜 오타와에만 그런 관행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오타와 지사가 항상 지적재산권법과 관련하여 로펌의 중심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리고 로스쿨에 진학하는 이과생이 문과생에 비해 훨씬 적은 숫자이기 때문에, 또 지적재산권 로펌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과생만을 뽑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내가 로스쿨을 다닐 때에는), 좋은 이과생 선점을 위해 그런 제도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운 좋게 이 루트로 취직이 되면, 로스쿨 학점은 전혀, 누구에게도, 공개가 되지 않는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지만, 여기에도 헛점이 있다.
바로 대형 로펌에서 3년 버티는 신입 변호사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뽑은 로스쿨 학생들이지만, 로펌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지, 3년이 지나기 전에 우후죽순처럼 잘려나간다. 그래서 대형 로펌에 신입 변호사로 취직하는 경우, 3년을 버텼는지를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잘리는 것에 대해 신참 변호사들이 트라우마가 있지는 않다. 해당 로펌과 잘 맞지 않았을 뿐이지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풍조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던 회사는 캐나다에서 지적재산권으로는 가장 큰 회사였는데, 그 곳에서 생물/화학 파트 책임자로 있던 파트너 변호사는 전국적으로 명망이 있었지만 알버타 주 출신으로 이전 로펌에서 3번이나 잘린 경력이 있었다. 그래도, 그런 이력이 4번째 로펌을 찾아, 그 곳에서 그 자리에 이르는 데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그 때가 학점이 다시 빛을 발하는 때다. 왜냐하면 새로 다른 로펌에 지원을 할 때에는 3년차 이하는 보통 로스쿨 성적표를 다시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첫 직장에서 오래 버틸 자신이 없으면, 취직이 되었든 안 되었든 3년 내내 학점 관리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학점으로 다시 평가받고 싶지 않으면, 그러니까, 나의 2학년, 3학년 학점을 공개하고 싶지 않다면, 첫 로펌에서 3년 이상, 안정적으로는 5년 이상 경력을 쌓는 것이 좋다. 그러면, 그 사이에 그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그럼, 내 이름 값이 학점을 대체하게 된다.
내 이름이 학점을 대체하는 그 때가 바로 로스쿨 학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때다.
결국 3년 내내 학점 관리를 하라는 거냐... 하고 묻는다면, "그게 안전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로스쿨 학점 관리의 스트레스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라고 묻는다면, 물론 있다 - 로스쿨 졸업하자마자 자기 로펌을 여는 거.
물론 그 길도 만만치는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