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실용 사이
예전에 함께 로펌에서 일하던 변호사의 연락을 받고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에 한국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유래한 ‘남편 사망 정식’이라는 표현이 한국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한 명의 남편 입장에서 표현은 유쾌하지는 않지만, 어머니를 보내드렸던 때를 생각하니 자신있게 욕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을 보내드리고도 배가 고파 오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끼니마다 챙겨 먹던 나를 생각하면, 남편을 보냈다고 배고픔을 막을 도리는 없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한국 드라마에 나온 상황은 좀 더 극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캐나다에서 비슷한 사건(?)을 본 적이 있다. 예전에 오타와에 있는 로펌에서 일 할 때, 입사 동기 변호사 한 명이 스키 여행을 다녀왔다. 눈이 많은 캐나다는 겨울이 오면 짧게는 1주일, 길게는 한 달 이상 스키 타기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휴가를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지난 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음? 이게 무슨 소리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스키를 타다가 지금 돌아왔다는 말은 아닐거고… 하며 물어보니, 그게 맞단다.
설명인즉슨 아버지께서 여러 해 동안 병 중에 계셨는데, 이번 스키여행을 갈 때 말씀하셨단다. 나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니, 혹시 스키 여행 중에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 때문에 중간에 돌아오지는 말아라 – 라고.
그래서 이 놈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도 진짜 끝까지 스키를 타다 온 거다. 아버지와 그렇게 얘기가 되었으니까. 장례에도 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버지와 그렇게 얘기가 되었으니까.
스키 여행 중간에 급히 돌아온다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나시는 건 아니니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그래도 부모님 돌아가시면 3년을 무덤 곁에서 지내면서 슬픔을 표시했다던 조상들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에게는 매우 낯선 광경이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부모 사망 스키’라 해야 할 지도 모를 이 일은, 한국에서라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더랬다. 마음보다 형식과 실용을 더 따지는 캐나다에서나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을 한국에 두고 캐나다로 떠나 온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겠지만, 한국을 떠나면 '효'를 가르치기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영어에는 효라는 단어 자체가 없고, 아이들은 자꾸 영어만 쓰려고 하니 대체 효도라는 개념을 어떻게 가르치나 싶었다.
효 뿐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내면을 중요시하고, 나의 내면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데에 익숙하다. 그래서 행동으로 평가하지 않고 자꾸 마음을 보여달라 요구하고, 또 기꺼이 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엄마, 아빠가 외식을 한다고 해서 자식이 수능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건만, 자식이 수능을 치르는데 나가서 외식을 하는 엄마, 아빠는 한국에는 없을거다. 고 3 자녀를 가진 한국의 부모는 자식의 수능을 마음으로 함께 치른다.
그러다보니 마음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캐나다 교육보다 한국의 교육이 어쩌면 나은 점이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추세도 점차 바뀌어 갈 모양이다. 남편 사망 정식이라는, 다소 섬뜩할 수 있는 표현이 그리도 자유로이 한국의 온라인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말이다. 점차 마음이 덜 중요해지고 실익과 실용이 더 중요해지니, 배우자가 죽었다고 짜장면를 거를 이유없고, 부모님 돌아가셨다고 스키타지 않을 이유가 없는 그런 날이 한국에도 내 생각보다 속히 오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