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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Feb 21. 2024

종자로 썩을 것인가, 6년근 홍삼이 될 것인가

나를 개갑시키려면

산삼이 귀하다는 건 한국에서는 삼척동자도 안다. 산삼이 귀한 건 그 약효에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귀해서다. 아무리 약효가 좋아도 뒷산에 널린 것이 산삼이라면 그렇게 귀히 취급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산삼을 좀 쉽게 구해보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온 것이 야생에 산삼 씨앗을 뿌려 얻는 산양삼이고, 그보다도 좀 더 쉽게 구해보고자 근처 밭에다 심는 것이 인삼이다. 


그런데, 인삼이라고 해서 키우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흔히 보는 인삼 사진에서 지상부의 빨간 씨앗을 심으면 바로 인삼으로 자라는 줄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인삼 씨앗은 매우 단단한 외피로 둘러쌓여 있는데, 이 외피를 뚫고 발아시키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운 좋게 자연에서 그냥 발아가 된다고 하더라도 씨앗을 뿌린 후 1년 반-2년이 지나야 발아가 되기 때문에 싹 트는 걸 기다리다가 숨 넘어가는 건 둘째치고, 그만큼 토양 중에서 생기는 병충해에 노출이 많이 되니 제대로 된 수확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인삼 종자가 발아할 수 있도록 물과 온도를 조절해 가면서 애지중지 100일을 노력하면 단단한 외피가 벗겨지면서 비로소 좀 쉽게 발아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진다.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갑옷을 벗기는 것과 같다 하여 개갑이라 부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개갑은 인산 종자에 뭔가를 더하는 작업은 아니다. 영양제를 주는 것도 아니고, 외피를 망치로 두드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삼 종자가 가진 발아의 잠재력을 믿고, 그 잠재력이 피어날 수 있는 조건에 씨앗을 두는 것 뿐이다


나는 처음 회사 생활을 시작하고 거의 15년간을 양복을 입고 생활했고, 내 주위 사람들도 다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었다. 넥타이가 거추장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넥타이를 맬 때마다 느끼는 긴장감이 나를 조금 더 긴장하게 하고 조금 더 성실하게 하고 조금 더 열심을 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캐나다에 와서 로스쿨을 다니고 로펌을 다니는 약 8년동안 양복을 입지 않았더니, 개업을 하고 나서도 뭔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고 사무실도 조금 헤이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어서 긴장감을 주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평복으로 생활해서인지 내가 양복을 입었다는 것을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황당한 경험을 꽤 오래, 1년 정도 했었다. 출근 할 때 양복을 입고, 퇴근하면서 양복 윗도리를 걸칠 때에만 내가 양복인 것을 깨닫는, 어찌보면 말도 안 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니, 근무 중에는 양복을 입은 긴장감을 가질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건, 내 주위에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나 밖에는 없었기 때문일게다. 내 주위가 모두 양복쟁이였다면, 나는 평복을 입고 있어도 양복을 입은 긴장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주위 여건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변화를 꾀하기는 그래서 어렵다. 인간은 주위에 묻어가게 되어 있으니까.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은 어쩌면 인삼보다 훨씬 싹틔우기가 어려운 존재가 아닐까 싶다. 물 주고 온도 조절하는 것으로 다 싹을 틔우고 다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세상에 꽃 아닌 이가 없고 열매 맺지 못할 이가 드물테니까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삼 종자를 개갑시키기 위해 적당한 환경을 만들어 주듯 내가 개갑할 수 있는 자리에  나를 놓는 것이 나의 개갑에 가장 중요한 일 아닐까. 


그래서, 내게 목표가 있다면 지금 내가 받는 것이 얼마인지보다 지금 내가 선 자리, 내가 걷고 있는 길의 환경을 먼저 보아야 한다. 월급보다도, 복지보다도, 연금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를 일단 싹 틔우는 일이다. 아무리 영양제를 쏟아 부어도 내가 개갑이 되지 않은 상태라면 내 것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좋은 환경에 놓고 인위적으로 발아를 시켜도 100일이 걸리이, 인삼 종자 개갑은 물론 오래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2년 가까이 걸릴 시간을 100일로 단축시켰다면, 아니 어쩌면 싹트지도 못할 것을 싹 틔웠다면, 그것으로 100일 기도의 효험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일단 발아를 하면 4년근, 6년근 인삼이 되는 대로가 열린 것이다. 물론 개갑과 발아 그 후에도 햇빛과 토양과 물과 병충해 관리를 계속 해야 하겠지만, 가장 큰 고비는 넘긴 것이니, 내가 인삼으로 영글고, 다시 6년근 홍삼이 될 수 있는 가장 큰 관문을 넘어 선 것이다. 


그러니, 주위를 한 번 둘러 보시라. 내가 필요로 하는 환경인지. 햇빛을 피해야 하는데 볕이 잘 드는 곳은 아닌지, 건조해야 하는데 습한 곳은 아닌지. 어쩌면 근무 환경이, 어쩌면 동료나 상사가, 내게 적당하지 않은 환경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환경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내 외피를 벗기고 싹 틔우고 뿌리내릴 다른 곳으로 나를 옮기는 것이 목표에 다다르는 첫 단계다. 


그 첫 단계는 항상 불안하다. 하지만, 종자로 썩지 않고 6년근 홍삼으로 자라려면 그 수 밖에는 없다. 적어도 인삼 종자의 잠재력보다는 더 큰 잠재력이 내게 있다는 것을 믿고, 적당한 환경에 나를 맡겨야, 개갑이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혹시 4년근에 머무르게 된들 어떠한가. 썩지 않고 열매 맺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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