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 채용박람회
입도선매라는 말이 있다. 쌀이 수확된 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벼가 수확도 되기 전 아직 논에 심겨진 상태에서 미리 구매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투기이고 투자다. 요즘은 쌀이 남는다니 벼를 미리 사는 경우는 없을 듯 하지만 김장철 배추 값이 올라갈 것 같으면 배추밭째로 사들이는 투기가 있다는 기사는 아직도 가끔은 보이는 것 같다.
로펌에서 사람을 뽑는 데에도 입도선매의 방식이 선호된다. 이제 막 1학년을 마친,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로스쿨 학생을 summer student 라는 명목으로 (여름방학동안 일하는 일종의 알바나 인턴 개념이다) 미리 채용하는 것이다.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1학기가 되면 로펌들이 캠프를 차리고 면접을 보는 채용박람회가 로스쿨마다 열린다. 웬만한 중형 이상의 로펌들이 대거 참여하기 때문에 좋은 대우를 받고 변호사 생활을 하려는 모든 학생들이 참가한다. 그 뿐이 아니라, 온타리오에서 로스쿨을 졸업하면 뉴욕에서도 변호사 시험을 보고 뉴욕주 변호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 대형 로펌들도 많이 참석하니, 미국 쪽 진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중대형 로펌들은 나중에 변호사들을 채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이렇게 학생 때부터 키워 온 사람들을 변호사로 만들고, 그 중에서 실력있는 사람들만 파트너 변호사 자리에 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보니, 2학년 1학기에 있는 채용 박람회에서 고용이 되지 않으면 중대형 로펌으로의 진출은 쉽지 않다는 인식도 있어서 이 채용 박람회에 목숨거는 로스쿨 학생도 많다.
Osgoode Hall Law School이나 University of Ottawa Law School 과 같이 로스쿨 정원이 많은 경우에는 여러가지 다른 취향의 학생들이 입학하기 때문에 대형 로펌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도 꽤 있는 편이다. 내 동기들 중에도 인권 변호사나 원주민 마을 변호사 등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로스쿨에서 학생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취업 코스 중 하나가 이 채용박람회이다.
기준은 일단 1학년 학점이다. 어느 로스쿨이던 1학년 때는 거의 동일한 필수 과목을 배운다. 계약법, 형법, 소송법, 재산법, 헌법 등이다. 게다가 캐나다의 모든 로스쿨은 모든 과목에서 철저하게 정규분포로 학점을 분배한다. 쉽게 말하면 학점 인플레가 없다. 그렇기에 1학년 학점은 학교가 달라도 모든 학생들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잣대가 된다.
그래서 대우 좋은 대형 로펌을 가려면 무조건 1학년 학점이 좋아야 한다. 야망있는 학생들이 1학년 학점에 목매는 이유가 이해된다. 평점 B가 되면 면접에 이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보지만 B+정도 되어야 학점으로 인한 피해는 없는 안전선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학점이 안전선을 넘어가야 그 다음에 지원서가 중요해 지고, 면접이 중요해진다.
학부 전공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지적재산권 로펌들은 이과를 선호한다. 선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 과장하면 대형 지적재산권 로펌들은 이과만 뽑는다. 특허라면 몰라도 상표나 저작권 문제라면 크게 문과, 이과를 가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도 고집스럽게 이과만 뽑는다. 내가 이과가 아니었다면 Smart & Biggar와 같은 대형 로펌에서 지적재사권 변호사가 될 기회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지적재산권 변호사를 하기로 한다면, 생물/화학 분야보다 공대 전공이 투자 효율이 높다. 내가 다니던 로펌에서 반도체 등을 다루는 공대 쪽 특허 변호사들은 전원 학부 출신인데 반해 유전자와 같은 분야를 다루는 생물/화학쪽 특허 변호사들은 기본 학력이 석사이고 대부분은 박사였다. 그러니 투자한 시간이나 노력이나 금액을 따져보면 공대가 효율이 높다 - 지적재산권 분야에서는.
출신 학교의 차이도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로펌 지원서를 작성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써 본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실수하기도 쉬워서 수십 개의 로폄에 지원을 하면서 회사 이름을 뒤바꾸어쓰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워털루 대학을 나온 친구들은 지원서를 정말 쉽게 잘 썼다. 워털루 대학은 학부시절에 지원서를 쓰는 훈련을 혹독하게 시킨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된 한국인 연구자 분들 말로는 워털루 대학 출신 연구원들이 토론토 대학이나 맥길 대학 출신들과 비교해도 일반적으로 일을 더 잘 처리한다고 했다.
면접은 한국 회사 면접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굳이 다른 점이라면 면접관이 전혀 권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다. 마치 친화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주 목적인 것 처럼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속지 말아야 한다. 웃고 떠드는 사이에도 세세한 평가가 있다. 동기 중 하나는 성적이 좋고 지원서도 잘 써서 미국 회사에서만 10군데 넘게 2차 면접 통지를 받았다. 캐나다 대형 로펌에서도 대부분 2차 면접을 통지해 왔다. 하지만, 20군데가 넘게 면접을 보고 단 한 군데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1-2군데만 2차 면접을 본 동기들이 최종 합격한 경우가 많았다.
누구나 좋아하는 후보가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 뿐이다. 한 군데에서라도 자기를 잘 드러내고, 그 부분을 인정해 주는 곳으로 가면 된다. 로스쿨을 다닐 때에 보면 정말 머리 좋고, 성격 좋고,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소위 넘사벽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있다. 모든 로펌과 법원에서 그 학생들을 원할 것 같다. 하지만, 로스쿨을 졸업할 때 보면 그런 넘사벽 학생들도 대부분 선택지를 2개 이상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졸업할 때가 되면 그런 넘사벽들에게도 일반적으로 딱 1개의 진로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된다. 짝짓기에서 하나만 잘 고르면 될 일이니 능력 있어 보이는 친구를 부러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채용박람회에서 채용이 되는 학생은 많지 않다. 그래도 실망하면 안 된다. 실망하면 포기하시 쉽다. 예전에 쓴 글 (https://brunch.co.kr/@e5c821d0bd7b442/34)에서 소개한 1세 아주머니 로스쿨 학생의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아서 결국 바라던대로 한인 사회에서 명망있는 변호사로 정착할 수 있었다.
실망하지 않으려면 어딘가 내 자리는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내 자리가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일단 전진할 수 있다. 일단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내 자리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채용박람회는 중요한 기회이지만, 유일한 기회는 아니니까.
입도선매 당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쌀이 되어 있다면 언젠가 팔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일단 논에서 그냥 썩지 않고, 알곡이 되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