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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이 필요해

다르지만 정확한 시각을 가진 자, 그대 이름은 멘토

by 신광훈

내가 다닌 Osgoode Hall Law School 에는 한인학생회 (Korean Law Student Association; KLSA)가 있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한 학년에 10명 이상의 한국 학생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 학년의 정원이 300명 정도이니 소수 민족 (?) 인 한국인이 10명 이상이었다면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입학했을 때에는 한 학년에 3-4명 정도로 한인 학생의 수는 줄어 있었다.


KLSA에서는 고학년과 1학년을 이어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이 있었다. 1학년 학생이 원하는 분야나 제반 상황을 고려해서 가장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혹은 학교 생활이나 진로에 대해서 적합한 조언을 줄 수 있는 선배 중에서 멘토를 정해주게 되는데, 나는 에스더라는 여학생이 멘토였다. 이 학생이 나의 멘토가 된 이유는 Esther가 그 당시 유일한 이과 출신이었고, 내가 관심이 있었던 지적재산권법 관련 자문을 줄 수 있는 유일한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로스쿨에 입학할 때부터 원하는 분야가 확실한 학생들이 많지만 졸업하는 시점에서 본인이 원한는 분야에 가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은 본인이 합격한 로펌에서 하는 일에 자신을 맞출 수밖에 없고, 아무리 뛰어난 학생이라도 졸업하는 시점에 여러 개의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지적재산권에만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 영어만 놓고 봐도 다른 학생들과 경쟁이 안 되는 상황에서 내게 있는 유일한 잇점인 이과적 지식이라도 사용할 수 없다면 한국에서 인정받을 만한 캐나다 경력을 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는 지적재산권 로펌들의 성지다. 오타와에서 작은 강 하나만 건너 퀘벡주로 넘어가면 5분 거리에 캐나다의 특허청 (Canadian Intellectual Property Office)가 있기 때문에 지적재산권을 전문으로 다루는 로펌들의 본사는 대부분 오타와에 위치하고 있다.


온타리오의 모든 로스쿨들은 1학년 성적을 바탕으로 2학년 학생부터 summer student (일종의 인턴, 혹은 여름 알바) 를 채용하는데, 특이하게도 오타와의 대형 지적재산권 로펌들은 로스쿨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1학년을 뽑기 시작한다. 로스쿨 학기는 9월에 시작하는데 10월말에 면접을 보고 11월에 그 다음 해 여름 방학에 함께 일할 summer student 의 채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로스쿨 학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뽑는 것이니 독특한 관행이었다.


나도 로스쿨 게시판에 붙은 오타와의 채용 공고를 10월에 보았다. 하지만, 영어도 서툴고, 캐나다에 오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 학생을 이런 로펌들이 뽑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좀 더 솔직하게는 대형 로펌에서 영어로 일할 자신이 없었고 요구하는 내용으로 서류를 꾸며낼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판례를 읽고 수업을 따라가는 것 만으로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던 때였으니), “나중에 영어를 좀 더 잘하게 되면” 등과 같이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고 지원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관심있는 학생들도 많았다. 캐나다에서 가장 급여가 높은 부문이 세법 분야고, 그 다음이 지적재산권, 그 다음이 기업 인수합병으로 인식되어 있던 때라 주위에 지원자가 많았다. 그 경쟁만 해도 내가 낄 자리가 없어 보였는데, 다른 학교까지 생각한다면 내가 그 경쟁을 이겨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원 마감 바로 전날 밤 10시 경에 멘토인 에스더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타와에 지원을 했느냐는 것이다. 아니라고 했더니 관심있는 분야인데 왜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그래서 솔직하게 이유를 얘기했더니 에스더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도와드릴께요. 지금 작성해요”. 하지만, 나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몇 주씩 준비를 해도 안 될 것이 뻔해 보이는 일을 지금 한다고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읽어야 할 교재와 판례가 눈 앞에 산더미 같은데 시간 낭비를 해야 할까.


그래서, 안 하겠다고, 도저히 할 시간이 없다고, 내일 수업 준비도 못 했다고 계속 거부했다. 하지만, 나와 띠동갑도 되지 못하는 그 나이어린 멘토는 몇 십분 동안 (사실 그 시간이 많이 아까웠고, 표현은 못했지만 짜증도 났다 - 내가 안 하겠다는데...) 나를 다그치고 다그쳐서 결국 나는 지원을 하겠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접고 바로 지원서와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력서는 로스쿨에 지원할 때의 것이 있어서 약간만 수정했고, cover letter라고 불리는 지원서 작성에 집중했다. 한 시간안에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서둘러 작성해서 이메일로 보냈는데 이메일을 보낸지 20분쯤 후에 에스더의 수정안이 왔다. 열어보니 온통 초록색으로 빼곡하게 수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메시지가 왔다. “온통 빨간색이어서 죄송합니다. 도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력서와 지원서를 잘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어요”. 그래서 나도 답장을 보냈다. “내 스크린에서는 다 초록색이어서 괜찮아”.


이력서는 로스쿨을 통과했으니 별 수정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력서도 빼곡하게 수정이 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수정해야 하느냐고 했더니 에스더가 이렇게 말했다.


로스쿨하고 로펌은 보는 시각이 달라요.


아, 당연한 건데 생각을 못했네. 수긍하고 수정된 부분을 검토하고, 수정하고, 의견을 준 부분은 보충하고…. 이렇게 해서 다시 에스더에게 보내면 에스더가 수정을 하는 식으로 해서 마무리를 하니 새벽 5시가 넘어 있었다. 에스더는 자기 일도 아닌 일에 함께 밤을 세워주었다.


대부분의 로스쿨에는 로펌 지원과정을 도와주는 자문가들이 있다. 이름있는 로펌에 많은 학생이 채용이 되어야 로스쿨의 이름도 유지가 되기 때문이다. 에스더는 완성된 서류를 꼭 그 자문가에게 검토를 받은 후에 제출하라고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기에, 지금 약속이 잡히겠냐고, 꼭 그래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와는 보는 시각이 달라요.


그래서 아침부터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걸어서 지원 자문가와 약속을 잡고 상담을 받았다. 지원 마감날이라 고 사정했더니 중간에 시간을 내 주어서 신속하게 의견을 받을 수 있었다. 받은 의견을 바탕으로 다시 수정을 하고 로펌 6군데에 지원서를 보냈다.


기대가 크지 않아서 매일매일 수업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캐나다에서 지적재산권 부문에서 가장 큰 로펌에서 면접 날짜를 잡자는 이메일을 받았다.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그 후에도 규모로 캐나다에서 가장 크다는 로펌을 포함하여 총 3군데에서 1차 합격통보를 받고 면접날짜를 잡았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면접을 준비하기 위해 내가 지원한 서류들을 다시 보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내용과 에스더나 로스쿨의 자문가가 중요하게 생각한 내용이 많이 달랐다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어, 오타와의 로펌들은 오랫동안 오타와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니 오타오와의 연계성을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이나, 오타와에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암시를 지원서에 쓰라는 자문가의 조언이나, 이력서는 두 장, 지원서는 한 장에 맞추어야 하고 이력은 최대한 계량화를 해야 선호한다는 에스더의 조언 등은 내가 혼자서는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에스더로 인해 부족한 내 영어가 완벽한 영어로 탈바꿈한 것은 특혜 중의 특혜였다.


다르지만 정확한 시각과 능력을 가진 사람의 도움은, 기적을 부른다.


결과적으로 나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지적재산권 로펌과 7 Sisters로 불리는 7대 대형 로펌 중 한 군데에서, 총 2개의 첫 여름방학 일자리를 제안받았고, 에스더와 상의하여 지적재산권 전문 로펌으로 가기로 하였다. 내가 이 경쟁을 뚫고 합격을 하다니. 제대로 된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뻐저리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가 여러 번 감사를 표했을 때 에스더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있으면 그렇게 해 주세요”.


내가 지적 재산권변호사가 된 후에 한인 로스쿨 학생이 전화가 왔다. 오타와 지적재산권 로펌에 지원을 하고 싶은데, 찾아보니 한인 변호사가 있어어 연락을 했다고, 시간이 되면 자문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느 에스더가 나에게 한 것 처럼 내가 아는 모든 노하우를 알려주려고 노력했고, 그 학생도 오타와 지적재산권 로펌에 지원해서 합격을 했다. 에스더에게 진 빚을 갚은 것 같아 좋았다.


그 학생도 나에게 감사를 표했고, 나는 에스더가 나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해 주었다 – 다음에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힘껏 도와주세요”. 그 다음 해에, 이 학생의 도움으로 또 다른 한인 로스쿨 학생도 오타와행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다.


캐나다 한인 사회에는 우스갯소리로, 공항에 마중나온 사람이 식당을 하면 나도 식당을 하게되고, 세탁소를 하면 나도 세탁소를 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끌어주는 사람의 역할이 그만큼 결정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내가 알아야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을, 내게 필요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고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멘토이고, 귀인이다. 귀인은 내가 막힌 길에 서 있을 때 벽을 허물어 주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에스더는 물살이 너무 거세서 건널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게 해 준 귀인이었고 나이는 어렸지만 정말 고마운 멘토였다.


그런데, 로스쿨을 졸업한 후에 알고 보니, 에스더와는 제 3자를 통한 다른 인연도 있었다.


내가 로스쿨과 MBA 사이에서 고민하던 시절, 로키 산맥 관광을 갔었다. 그런데 밴쿠버에 한인 사회를 위한 일을 많이 하시는 것으로 유명한, 그리고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로도 방영이 되었다는 황씨 성을 가지신 한인 변호사가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조언을 구해보고 싶었으나, 늘 바쁜 변호사라는 말을 들은 터라 상담 비용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이메일을 하나 보냈다. 로스쿨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만학도인데, 진로 상담을 할 수 있겠냐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금방 답변이 왔다. 다음 날 30분 정도 시간을 내 주시겠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만나서 무료 상담을 해 주시는데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을 내 주셨다. 너무 감사했고, 그 날의 상담이 MBA대신 로스쿨을 선택하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황 변호사께서는 에스더가 로스쿨에 진학할 때도 조언을 주신 분이었다. 에스더가 감사를 표했을 때 그 분께서는 "그럼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갚으라"고 하셨고, 에스더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나에게 갚았던 거라고 했다.


두 번째 감동이었다. 선행은 흘려보내면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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