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에 성공하는 기본 기술
면접을 보러 오타와에 첫 1박 2일의 장거리 여행을 가게 되었다. 토론토부터 오타와는 한국으로 따지면 서울 - 부산 거리라 나에게는 장거리였지만, 캐나다 사람들에게는 당일치기를 하는 단거리 취급을 받는 걸 보고 나라가 크다 보니 거리에 대한 감각은 많이 다르구나... 하고 생각했더랬다.
말이 1박 2일이지 24시간 안에 3군데 면접을 보고 돌아와야 해서 일정이 촉박했는데, 오전 6시 경에 토론토를 출발해서 오타와로 향하던 새벽 기차가 중간에 멈추어 버렸다. 철로 보수란다. 면접에 늦을까봐 속은 타들어 가는데, 이런 일은 캐나다에서는 흔한 일이니 다들 이해한다고 급하면 가까운 마을에 가서 시외 버스를 알아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승무원에게 너무 화가 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캐나다 대중 교통, 특히 기차나 지하철은 너무 시간 예측이 불가능해서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 일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시간이 중요한 약속이 있으면 다들 자기차로 운전을 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2시간만에 선로 보수가 끝나고 첫 번째 면접에 간신히 시간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충분히 여유있게 토론토를 출발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인종, 나이, 종교, 혼인관계 등에 기초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부분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부분을 확인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이들 학교 이아기나 졸업년도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결혼 관계를 짐작한다거나, 나이를 짐작하는 식이다. 어떤 식으로 나에 대해 알아 보려고 할까, 감추고 싶은 사항들은 어떻게 감추어야 하나 걱정을 하면서 첫 번째 면접을 시작했다.
예상대로 내 이력서에 기초한 이런 저런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왜 캐나다에 왔어? 부터 시작하는, 대부분 내 로스쿨 지원서에 있는 평이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력서 검증이 끝나고 면접관이 물었다. “나도 Osgoode 출신인데, 요즘 학생들간에 경쟁이 치열하다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 순간 '이건 함정이다'라는 경고가 머릿 속에 울렸다. 경쟁이 심하다고 느낀다면 그 만큼 학업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고, 친구들과 어울릴 여지가 있다는 것은 수업을 따라가는 데에 별 무리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아니, 별로 경쟁은 못 느끼겠는데? 서로 협조적이고 다들 친해. 친구들이랑 어울리느라고 아내한테 매일 혼나”라고 대답했다.
1학년 학생들 사이에 경쟁이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고, 사실일 수도 없다. 다만, 내 학교 생활을 어떻게 확인하려나 하고 계속 생각하던 차에 받은 질문이라 경쟁이 심하다고 하면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나이도 사실 많이 걱정이 되었는데 (대부분이 20대 중반의 학생들이기 때문에), 백인들 눈에 동양인은 항상 어리게 보이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로 면접관은 내 나이를 실제보다 10살쯤 어리게 보아, 30대 초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다행이었다.
그 뒤에도 “면접 끝나면 바로 토론토로 가는거야?” 라는 질문도 있었는데, 이 질문도 나에게는 “몇 군데서 면접 제의를 받았어?” 라고 들렸다. 그래서 “사실 다른 곳도 면접이 있어서 이틀 자고 갈 꺼야” 라고 대답했다. 이틀을 자고 간다고 했으니 적어도 4군데 이상에서 면접 제안을 받은, 다른 로펌에서도 관심이 많은 후보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모든 회사가 공통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토론토에서 오타와로 와서 일할 수 있어?” 였다. 캐나다의 수도이긴 하지만, 토론토나 밴쿠버에 비해 큰 도시가 아니다보니, 변호사들을 키워 놓으면 큰 도시 사무실로 보내 달라고 하거나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많다는 것을 나는 로스쿨의 지원 전문가에게 들었던 터라, 미리 준비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캐나다까지 8,000km가 넘게 온 거라 토론토나 오타와나 별 차이가 없어”. 물론 로스쿨 졸업 후에 캐나다에 있게 될 지 아닐 지도 확실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면접관 입장에서는 속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일하면서 정직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정직이라는 것이 장점을 보이지 못하는 데 일부러 약점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로펌도 인턴 지원자들에게 자신들의 로펌을 좋게 보이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신들의 로펌을 미화하지 않는가.
장점과 약점을 동시에 드러낸다면 모를까, 장점을 아직 보여줄 방법이 없는데, 굳이 약점만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바보 짓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비슷한 형식으로 끝났는데, 세 번째 회사 면접을 보는 날이 할로윈데이였다. 이곳은 면접을 위해 4사람이나 들어와서 나를 긴장시켰는데, 가장 높은 직책인 파트너 변호사가 카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잭 스패로우와 정말 똑같은 해적 분장을 하고 면접실에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파트너라는 직책에, 면접이라는 자리의 공식성을 감안하면 내가 생각하기 어려운 처신이었는데 (여러분은 상상이 되는가... 대기업 임원이 양복대신 잭 스패로우 분장을 하고 면접을 본다는 것이) 이유는 간단했다 – ‘딸들이 원했다’는 것이다. 캐나다의 자유 분방함의 정도가 내 상식을 벗어난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이 세 번째 회사와의 면접이 가장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거의 1시간이나 웃고 떠들면서 진행되어 내심 '아, 이 회사가 나에게 제안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면접이 끝나면 각자 자기 학교로 돌아가서 전화를 기다린다. 로펌들이 서로 약속을 하고 같은 날짜 같은 시간에 원하는 학생들에서 우선 순위에 따라 전화를 하는데, 한 군데를 일단 수락하면 다른 곳을 수락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어느 곳이든 전화만 오면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히 첫 번째 면접을 본 곳에서 전화를 받아 바로 여름 인턴 자리를 수락했다.
그 후에도 한 군 데 더 제안이 왔는데 우선 수락을 한 곳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했다. 어쨌든 유일한 제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첫 번째 회사에 크게 미안한 마음 없이 (면접 때 사실과 살짝 다른 말을 가장 많이 한 곳이라) 인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가장 기대했던 세 번째 로펌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을 보면 면접 분위기로는 당락을 가늠하기 어렵다.
나를 평가하려는 이런 애매한 과정은 3년 후 정식으로 변호사 채용을 제안받기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 같았다. 나와 내 동기들의 첫 여름 인턴 기간이 끝나갈 때쯤 로펌에서는 학생을 담당했던 파트너 변호사들과 멘토 변호사들이 학생들에게 회식을 베풀어 주는 자리가 있었다. 그 때 한 파트너가 나와 이런 저런 일반적인 이야기 (오타와는 살만했어? 첫 인턴은 어땠어? 뭐 이런 이야기들) 를 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여름 인턴 제안 몇 개 중에서 우리 회사를 선택한거야?"
내가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오래하다 와서 오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왠지 본인들이 나를 뽑은 것이 잘 한 것인지 확인해 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여기 한 군데에서만 연락이 왔는데?" 라고 한다면 (그렇게 대답한 동기도 있었긴 했다) 조금 찝찝해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이래서 두 군데에서 제안을 받았지만 "세 군데에서 제안을 받았는데, 종합 법률회사보다는 지적재산권 전문 로펌을 가고 싶었고, 여기가 지적재산권으로 가장 큰 곳이라 여기로 왔어" 라고 해 주었다. 그냥 내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아, 그래? 오퍼 많이 받았구나""라고 말하는 파트너 변호사의 얼굴에 살짝 안도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위의 사례들은 다 내가 과민반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내 촉이 맞을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높다는 데에 베팅하고 싶다.
진화에 관심이 많은 나는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과 수컷이 서로를 선택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를 시험하고, 또 속고 속이는 사례를 많이 읽었다. 로펌의 인턴 채용 과정도, 변호사 채용 과정도, 결국은 그런 짯짓기의 과정과 다를 바가 없으니, 일단은 선택받는 것에 집중할 일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