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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Feb 08. 2023

한국인들이 동업에 실패하는 이유

동업에 성공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정의롭다

토론토에는 유명한 유리 거리가 있다. 창문, 거울 등 유리와 관련된 제품이 필요할 때 그 거리로 가면 웬만한 건 다 해결된다. 다운타운이 아니라서 좀 불편한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우리 집 유리창을 수리해 주신 유리가게 사장님은 한인 중에서는 꽤 규모있는 유리 가게를 하시는데, 그 분이 그 거리에 처음으로 유리가게를 여신 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근처에 한 중국인이 유리가게를 열었단다. 같은 업종에, 그 당시만 해도 많지 않았던 동양 사람이고 경쟁도 치열하지 않았기에 금방 서로 가까워지셨고, 서로 집에 초대하며 온 가족이 식사를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중국인이 다른 중국 사람의 보증을 서면서 자기 가게 옆에 유리 가게를 열어 주겠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한국 사장님이 "친척이냐"고 물어보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깜짝 놀란 한국 사장님은 "보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지 아느냐", "너도 지금 간신히 자리 잡아 가는 상황에서 이렇게 위험한 일을, 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하느냐", "바로 네 가게 옆에서 같은 중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할 경쟁 상대 아니냐"며 알고 지내던 중국인 사장을 말리셨다. 하지만, 그 중국인은 괜찮다며 밀어붙였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지내던 중국인도, 새로 들어온 중국인도, 계속 그렇게 중국 사람을 더 끌어 들이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니 그 거리는 중국인 유리 가게로 꽉 찬 유리 거리가 되었다고 했다. 그 거리에 유리 가게를 개척했던,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사장님은 결국 그 곳을 떠나셨다고 하면서, 중국인들 참 무섭다는 말을 여러 번 하셨다. 


이런 사례는 많다. 중국인뿐이 아니라 유태인들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많은데,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업을 하시는 한국 사장분들 입에서 꼭 나오는 말이 있다. 


한국인은 왜 중국인이나 유태인이 하는 것처럼 성공적인 동업을 하지 못할까? 


그건 나도 참 궁금했던 터였다. 한국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서 수완이 딸리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데, 왜 동업은 못할까? 혼자 이루는 것보다 같이 이루는 것이 분명 더 큰 경우가 많은데, 왜 협력이 안 될까? 얼마나 동업의 실패 사레가 많기에 캐나다에 진출한 한국계 은행에는 심지어 "한국인끼리 동업을 하는 사업에는 대출을 하지 마라"라는 불문율까지 생긴걸까.


그런데, 주위에 실패한 많은 한인 고객들의 동업 사례를 생각해 보니 우리가 협력 자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분야의 둘이 많나서, 서로 같은 분야 관심이 있는 셋이 만나서 동업을 하고 성취를 이루어 내는 사례는 내 고객 중에도 많이 있었고 한인 사회 전체적으로도 적지 않다. 


문제는 성취 후에 그 동업이 유지되지 못하고 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인이 동업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동업으로 성취는 하지만, 유지를 못 할 뿐이다. 왜 그럴까? 동업으로 일정 수준의 성취를 이루는 시기와 동업을 유지하는 시기에는 동업 유지에 필요한 중요 요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업으로 성취를 만드는 기간에는 시간, 노력, 노하우의 투자가 필요하다. 뭔가를 얻어가는 시기가 아니라, 가진 것을 갈아 넣어야 하는 시기다. 이 시기는 대부분의 한국 고객들이 동업을 잘 유지하면서 잘 헤쳐 나간다. 


문제는 이제 성취가 생겨서 그 성취를 나누는 과정에서 생긴다. 


각자가 나누어 받은 성취는 분명 혼자 이루어낸 성취보다 크다. 동업에서 다툼이 생긴 대부분의 고객들도 그건 인정한다. 그렇다면 동업이 이익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성취의 분배가 정의롭다고 생각되지 않을 때 한국인은 분노한다. 


내가 받는 실익이 동업으로 인해 더 커졌다고 하더라도, 그 분배가 정의롭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실익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6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받은 것이 5라면 분노한다. 혼자 일했다면 얻을 이익이 3밖에 안 되어도, 5로 만족할 수는 없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이 6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익을 포기하고서라도 서로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분배를 추구하다보니, 결국 동업이 깨진다. 


한국인은 아마도 투자의 정의보다는 분배의 정의에 좀 더 민감한가 보다.


성취가 없어서 서로 가진 것을 투자해야 할 때에는, 굳이 정의로운 투자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상대방보다 더 일하고, 더 많은 자금을 넣는 것이 좀 억울할 때는 있어도, 동업을 깰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는다. 투자 단계는 굳이 정의롭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성취의 나눔은 내게 정의롭게 보여야 한다. 


하지만, 주위에 성공한 한인 동업을 보면, 항상 초창기에는 부당한 분배를 참아온 한 쪽이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몫을 빼앗기는 것을 감내하는 사람이 있어야 동업은 유지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둘 다 큰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고객들의 동업에서 배운다. 


분배의 정의는 동업의 성취가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대부분의 경우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때까지 묵묵히 참고 기다리기엔, 우리는 너무 정의롭다.


한국인에 비해 중국인 고객들은 분배의 정의보다는 분배의 실익을 따져보는 경향이 있다. 중국인과 유태인 사이에서 그들의 "집단적 성취"를 버텨내려면, 이제는 우리도 분배 비율에서 정의를 찾기 보다는, 분배의 실익에서 정의를 찾아볼 때가 아닌가 싶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한민국에서 특히 잘 팔리는 이유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지만, 결국 우리가 정의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이 높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 아닐까. 개인적으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의를 추구함으로서 스스로의 입지가 좁아진다면 과연 어떤 정의를 추구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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