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은 없다.
친한 동창 셋이 모였다. 소주를 각 1병 정도 마셨는데, 한 친구가 전화를 받으러 밖에 나갔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둘만 남게 되자 적당히 술에 취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매일 바쁘게 살고, 만날 사람도 많아. 그런데 너무 외롭다.”
의외의 말이었다. 직장의 별인 임원에 오르고, 부부사이도 화목해서 동창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친구였다. 그 친구에게 외롭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의외였다.
나도 요즘에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서 그 말이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가족도 친구도 옆에 있지만 인생은 혼자서 걷는 것이고, 죽음의 순간에는 결국은 나 혼자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외로움의 시작은 어디일까?
중년기에만 외로운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적으로 다 외로웠는데 지금에서야 겨우 느끼는 것은 아닐까? 젊을 때는 바쁜 직장 생활 가운데에서 외로움을 느낄 여유를 가지 못했다가 이제 중년이 되어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나 자신을 돌아볼 눈도 생겨서 외로움을 느낀 것은 아닐까?
중년 친구들의 주요 관심사는 은퇴 후 생활이기도 하지만, 여자 이야기도 많이 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친구들의 주요 관심사는 골프, 여자 이야기다. 얼마 전 친구들과 1박 모임을 갔는데, 골프를 치고 싶어 하는 여성 세분이 따라왔었다. 여성 세분은 가정도 있고, 남편에게는 여자끼리 골프 친다며 인증샷도 보낸다. 왜 중년기에 여자 친구를 가지려는 것일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중년은 외롭다는 것이다.
스탠드바나 위스키바에 가서 웨이트리스와 이야기하면 편하다. 솔직하게 내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한다. 비밀이 보장되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묻어둔 속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특히 중년기에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외로움을 느끼는 원인은 대상 관계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상관계론은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발전된 이론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멜라니 클라인은 유년기의 엄마와의 대상관계의 눈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즉 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받은 아이는 성인 되어서도 주변 사람을 따뜻한 사람으로 본다.
내가 유년기일 때 부모님들은 먹고살기에 바빴다. 그 당시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고, 먹고사는 것이 제일 큰 어려움이었다. 부모님들은 생계를 위해 뛰어야 했고, 아이들은 많아서 자녀들 한 명 한 명을 따뜻하게 돌볼 여유가 없었다. 쉬운 말로 각자도생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따뜻한 보살핌이 그리웠다. 3남 2녀의 장남인 나는 어머니와 손을 잡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랑이 결핍되어 있고 그 사랑의 결핍은 외로움으로 이어진다.
또한 지금처럼 복지가 발전하지 않아서 치열하게 일을 해야만 먹고살 수가 있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항상 치열한 경쟁이 눈앞에 있었다. 그 치열한 경쟁 가운데에서 나 자신을 생각하고 돌볼 여유가 없었다. 외로움 자체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외로움이 더욱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는 남성 갱년기이다.
중년기에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호르몬의 생산과 분비가 감소되면서 여러 가지 신체상의 변화가 나타난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저하되면서 성욕과 활력이 감소하고 우울한 느낌과 무기력증, 피로감 등의 갱년기 증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다만 여성의 경우와 달리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는 급격히 저하되지 않고 서서히 감소한다. 그래서 이러한 증상들이 호르몬의 부족에서 오는 증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신체기능의 저하나 노화의 증상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중년기에는 외로움을 채워줄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에 있다. 특히 중년 이후에는 자존심이 강해져서 남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쉽지 않다.
아내에게 외로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내에게 속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답인데, 아내와는 대화 자체가 어렵다는 친구가 의외로 많다. 아내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내담자를 만나본 경우가 매우 드물다. 평생 직장에서 바빴고, 주말에도 골프 등 각종 모임도 많다. 아내와는 자녀, 돈 등 필요한 이야기는 하지만, 친밀하게 속 마음을 이야기 한 경험이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아내 하고는 친밀감을 느끼는 사이라기보다는 한 공간에 거주하는 하숙생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아내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다.
친구와 대화하는 것은 어떨까?
사회적인 친구는 많다. 그러나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과연 있을까? 대부분 모임에서 둘셋 만나는 경우가 드물고, 그룹으로 만난다. 최소한 10명쯤 이상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해서 만나는 거지 개인 간의 진솔한 대화는 거의 없다. 주로 정치 얘기하다가, 노후 생활 이야기하다가, 직장 이야기하다가 끝난다. 모임에서 외로움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내가 스스로 술을 마시고 싶어서 혼자 취해버렸다.
외로움의 끝은 어디인가?
나이가 들면 외로움이 없어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 정반대가 된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지는 것보다 더 완고해지고 고집이 강해지는 사람이 훨씬 많다. 젊을 때는 그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사회 관계망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노년기에 들어서면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고, 만나는 사람도 많이 축소하게 된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더 폐쇄적인 삶을 살게 될 우려가 높다. 노년의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력이지만 외로움과 사회적인 고립이 더 심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