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단절] 엄마의 네비게이션이 된 딸
아빠는 부도를 맞고 빚에 쫓기다가 결국 엄마를 위해 서류상 이혼을 했다.
빚쟁이들이 매일같이 집에 찾아와 엄마와 우리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 뒤 아빠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그 사이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빠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고모와 살다, 엄마와 살다를 반복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엄마는 해외에 있는 아빠를 챙겼다.
서류상 이혼을 했지만, 아빠와 엄마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고,
나 또한 엄마를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는 유난히 촉이 좋은 사람이었다.
해외에 있는 아빠의 외도를 자꾸 의심했고,
아빠와 다툼이 잦아지며 점점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어느 날이었다.
직장 앞에 연락도 없이 엄마가 왔다.
내가 서울로 올라오고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던 엄마인데,
엄마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가 외도를 하는 것 같고, 돈을 벌어놓고도 못 번 척하는 것 같으니
나를 보내서 상황을 살피고 싶은 것이었다.
서울생활을 하며 빠듯한 돈으로 이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날 밤 엄마는 몇 번째 이사인지도 모를 내 원룸에 처음으로 왔다.
내 방을 마음대로 뒤졌고, 무엇이든 나오는 대로 나를 추궁했다.
그리고 밤새 아빠에 대한 원망을 끝없이 쏟아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성인이 된 나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려고 누웠지만,
눈만 감으면 어둠 속에서 꽹과리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원망이 이명이 되어 밤새 귓전에서 비명을 질러댔고,
나는 단 한 줄의 잠도 청하지 못한 채 영혼이 하얗게 말라가는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10년 만에 아빠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엄마는 비행기표와 아빠에게 줄 것들을 챙겼다며 서울로 오겠다고 했다.
출국하는 날, 서울역에서 엄마를 만났는데 엄마 손에 비행기표가 두 장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들이닥쳐야만 증거를 잡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같이 갈 작정이었지만, 내게도 그 사실을 숨겼던 것이다.
옆에서 엄마가 지키고 있었기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 할 수도 없었다.
공항버스 안에서 엄마는 끊임없이 욕을 쏟아냈다.
승객들이 자꾸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와 나의 상봉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희미했다.
아빠의 눈에는 말없이 나타난 엄마에 대한 당혹스러움만이 가득 차 있었고,
그곳에서 나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엄마는 다 죽자며 주방으로 뛰어갔다.
아빠가 진정하라며 막아섰지만, 엄마는 이성을 잃고 있었다.
나는 심장을 토할 것처럼 울었다.
정말 다 죽어야 끝날 것 같았다.
세상에 모든 고통이 내게로만 오는 것 같아 미칠 것 같았다.
여덟 살에 느꼈던 심장의 통증을,
나는 그날 다시 느꼈다.
울다 지쳐 거칠어진 호흡을 다잡으려 애쓰고 있을 때였다.
“울지 마라. 느그 아빠 가슴 찢어진다.”
엄마의 낮고, 냉정한 목소리였다.
엄마에게는 이미, 나라는 존재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잠시 후 깨어나 보니, 꿈과 현실이 분간되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었나 싶을 정도로 아빠와 엄마는 평온했다.
"'어려운 시절에 고생한 니를 내가 우쩨 버리노.' 그 말에 느그 엄마 화가 풀려뿟다."
멋쩍은 듯한 아빠의 말은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무력감을 주었다.
아빠의 말 한마디에 엄마의 분노는 눈 녹듯 사라졌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 조각난 나의 영혼은 다시는 제자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가루가 된 것 같았다.
두사람의 다정함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풍경이 되었다.
누구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나의 희생은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나는 그저 엄마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엄마를 목적지에 데려다 놓은 것으로 사라지면 되는 존재 같았다.
그곳에는 배신감에 불타는 아내와 당혹스러운 남편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내가 기대했던 아빠와의 상봉은 엄마의 목적 달성으로 그렇게 끝나버렸다.
하지만 나의 희생이 무색하게도 아빠와 엄마는 사이가 자꾸 틀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라는 이름을, 그 존재를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라는 이름에 한없이 흔들렸다.
나는 아직도 새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아홉 살처럼,
무능하고, 바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