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방패
예전에 한 영화배우가 팬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졌는데, 어느 팬이 배우에게 얼굴에 김이 묻었다고 하더란다. 배우가 깜짝 놀라 무엇이냐고 묻자 팬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잘생김!” 그 말을 들은 배우는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팬을 다독여줬다.
인터넷에 도는 그 영상을 보고 나는 아무도 몰래 망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만약 저 배우가 나였으면 어땠을까. 팬의 농담에 흠칫 놀라지만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나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리고 그 망상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그 웃는 얼굴이 너무나 못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와 엄마를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나마 엄마도 요즘은 “어릴 땐 귀여웠는데…”라며 아쉬움이 잔뜩 묻은 말을 나에게 건넨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는데. 그렇지만 엄마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럴 때마다 씁쓸한 미소로 지긋이 천장을 바라본다.
내가 아는 사람들에 의하면, 나의 얼굴이 꽤 순수하게 생겼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말이 마냥 칭찬인 줄 알았다. 적어도 못된 건달처럼 생긴 것은 아니니까, 그것만으로도 만족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르러 알고 보니 순수하게 생겼다는 말은 단순히 그 뜻이 아니었다. 그 말은 얼굴에 뚜렷한 점이 없이 그저 맹숭맹숭하게 생겼다는 뜻이었다. 옅은 눈썹, 작고 힘없는 눈, 뭉툭한 코는 충분히 그런 인상을 만들어내기에 매우 충분했다.
내가 못생겼다는 것을 처음 명확하게 지각을 하였을 때, 나는 마치 내가 벌거숭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사람을 마주할 때 처음 보는 것이 얼굴인데, 그 첫 관문부터 통과를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외모가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 평소보다 더욱 주눅이 들게 되었다. 그들 앞에서 나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후로 헤어스타일과 옷에 지대한 신경을 쓰게 되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마음에 드는 위치에 들어가지 못하면 5분이고 10분이고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과 씨름을 펼치기도 했었고, 원하는 옷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기도 했었다. 헤어스타일과 옷은 나의 자존심을 받쳐주는 최후의 전선이었으며 너무나도 잘생긴 사회에서 나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방패였다. 그 덕분인지 나는 잘생겼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을지라도 스타일이 좋다, 너 좀 꾸밀 줄 안다는 말은 비교적 자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칭찬은 모래성 같이 퍼석하기만 한 나의 심리를 유지해주는데 큰 기여를 했다.
아마 못생김에 대한 이러한 투쟁은 계속될 것 같다. 이미 나의 정체성은 나의 얼굴이 아닌 나의 머리카락과 옷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는 나의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그 과정이 귀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밤톨만 한 나의 심리를 조금이라도 부풀릴 수 있다면, 그것이 그렇게까지 무의미한 행동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직은 머리와 옷에 뜨겁게 고민하고 비교하는 나 자신이 밉지는 않다. 가끔은 오히려 뿌듯하다.
세상에는 잘생긴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나의 그러한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잘생긴 사람들이 정말 많다. 때로는 그러한 사람들이 내뿜는 눈빛에 압도되어 나의 눈을 불쑥 가리는 때가 있다. 그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정말 어설프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머리가 잘 잡히고 옷이 잘 입힌 그 어떤 날, 거울을 바라보며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에 잠시나마 그들에 맞설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 충전된다. 그리고 그 용기로 하루를 기어코 버틴다. 비록 바삭한 잘생김이 아닌 눅눅한 못생김이 내 얼굴에 잔뜩 묻어있지만, 나는 늘 그랬듯 조용히 옷을 두른다. 그것이 나의 방패이자 동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