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숫자보다 중요한 것
원래 감정의 기복이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다. 비록 밝은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우울함을 유지하며 그 선에서 적당히 오르락내리락한다. 하지만 이전에 계획했던 나 홀로 동해 여행이 좌절된 이후 거의 이틀 동안은 매우 깊은 무기력감과 자괴감에 빠져 살아있었다. 그까짓 바다 구경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그토록 한심하고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입맛도 떨어지고 잠도 오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한숨을 같이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은 꽤 나아졌다. 어젯밤부터 하락된 감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감정은 당연하다는 듯 원래의 수준으로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이상할 정도로 감정의 선이 급격히 수평으로 돌아오게 된 후 나는 지난 이틀을 되새김질해보았다.
그렇게 이틀을 돌이키다, 어쩌다 보니 과거의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고, 나는 그 과정에서 내가 지난 이틀 정도로 처져 있었던 적이 스무 살 이후로 처음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찬찬히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스무 살의 겨울, 당시 나는 재수를 망치고 한 달 가까이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였던 시절, 나는 내가 받은 처참한 성적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삶의 패배자였으며, 패배자는 침대에 갇혀있어야 옳았다. 폐인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나를 보며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나를 깨워 거실로 불렀다. 터덜터덜 나와보니 거실에는 솜이불이 펼쳐져 있었으며, 엄마는 소파에 앉아 나에게 이불 커버를 씌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엄마가 왜 이걸 시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하고 싶지도 않았으며 솔직히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나를 쳐다보는 엄마의 표정에 밀려 나는 억지로 이불을 집어 들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이불을 커버 속으로 넣으려 할 때마다 이불은 싫다는 듯이 몸부림을 쳤고 나는 그 하나 집어넣는 것마저 낑낑대었다. 엄마는 내가 버벅대고 있음에도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불과 커버의 매듭을 짓지 못하고 계속 헤매자 결국 조용히 지켜보던 엄마도 터지고 말았다. “이걸 이렇게 넣고 묶으면 되는데! 이거 하나 못해서 대체 왜 벌벌대고 앉았어!” 무서운 호통이었다. 가뜩이나 한 달 전부터 머저리처럼 기가 죽어있던 나는 그 소리에 더욱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엄마는 한숨을 쉬며 반대쪽은 자기가 할 테니 너는 그쪽부터 하라며 소파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겨우겨우 나는 엄마와 함께 이불 커버를 씌우는 데 성공했다.
이불에 커버를 씌우고 난 후,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네가 이불 커버를 씌울 줄 몰라도, 하려고 하니까 결국 했잖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나가서 개천이나 걷고 와.” 나는 등쌀에 밀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나섰다.
낯설 정도로 오랜만에 쐬는 햇빛이었다. 여전히 나는 모든 것이 무기력했다. 햇빛조차 쐴 자격도 없는 사람 같았다. 터덜터덜 개천으로 내려가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개천을 따라 조깅을 하고 있었다. 그저 부러웠다. 저 사람들은 내가 아닌 것이 그저 부러웠다. 나라는 사람이 아닌 것만으로도 그 사람들이 미친 듯이 부러웠다. 나는 몇 분을 맴돌다 이내 질려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수능을 망친 나를 꺼내 들어 스스로 험담이나 늘어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단 한 줄이었다. ‘아까는 소리쳐서 미안해. 항상 사랑한다 아들’
나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사람들이 쳐다볼까 고개를 숙이고 콧물을 닦는 척 질질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았다.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가채점을 마치고 울상이 되어 점수를 말하던 내가, 침대에서 죽은 듯 기생하던 내가, 이불 좀 제대로 잡으라는 호통에 고개만 숙이던 내가 미친 듯이 부끄러웠다. 엄마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성적표에 출력된 다섯 개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아들의 삶이었다. 엄마는 이불을 통해 번데기 안에 갇혀있던 아들의 삶을 다시 한번 세상으로 꺼내왔다. 엄마의 이불은 그저 단순한 이불이 아니었다. 나는 한 시간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다행히도 그 후 일이 신기할 정도로 잘 풀렸다. 될 대로 되라며 지원했던 학교는 정말 극적으로 합격했으며, 또한 나중에는 편입까지 성공하여 현재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삶이라는 것이 무조건 무너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절묘한 입시의 흐름에 따른 천운이 원인이었겠지만, 나는 믿는다. 그것은 모두 엄마의 이불이 만들어낸 마법이었으며, 그 마법이 나를 다시 세우고,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 이틀 동안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문득 이렇게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은 여전히 그때의 이불의 마법이 아직 몸속에 남아있어서일 것이다. 당시 스무 살 이후, 물론 나는 그 후로도 여기저기 부딪히며 깊은 우울과 걱정의 늪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날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지금 그때의 겨울을 떠올리며 생각이 드는 것은, 나는 엄마가 걸어준 마법이 있기에 끝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느껴진다. 엄마는 그저 나의 기운을 북돋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다시 한번 태어나게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은 문신처럼 남아 잊을만하면 나를 다시 일깨워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래서 엄마가 고맙다.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해준 가족들이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멈춰있던 나를 움직이게 해 준 그 이불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