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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공란

삶을 수식하고 싶었다

by 우인

오래간만에 방 청소를 하다 문득 삶은 공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라는 단어 뒤에 붙은 괄호는 늘 비워져 있으니 채우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튀어 오른 것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생각할 시간 정도는 잠시 가져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나는 나의 삶을 온갖 안 좋은 의미의 단어들과 결합했었다. 비극, 슬픔, 고독 등등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을 법한 단어들의 앞에는 항상 나의 삶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시작점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나에게 있어 삶이란 그다지 즐겁지 못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나 역시 전혀 즐거울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문득 머릿속에서 떠오른 그 문장을 곱씹으며 삶이라는 단어 뒤의 공란을 좀 더 기쁘게 채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밝고 따듯한 단어로, 혹은 시원한 단어로 삶을 수식하고 싶었다. 어지럽혀진 방에서, 나는 문득 순간의 희망을 마주쳤다.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비관한다. 나는 타인에 비해 끝도 없이 부족한 사람이고, 매일마다 새로운 좌절을 가슴속에 쌓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하물며 행복을 느껴볼 수 있는 사람인지의 늪에 빠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같은 날엔, 가슴의 그 심연 속에서 올라오는 가시가 나의 목구멍을 찌른다. 그럼 잘해보면 되지라는 말 한마디가 가시에 찔려 나오는 무조건 반사처럼 마른 입술을 가르고 튀어나온다.


따지고 보면 그렇기는 하다. 현실을 따지자면 우울한 것들은 셀 수도 없이 펼쳐져 있다. 당장 과제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 나의 미래까지, 두려워해야 할 것들이 산보다 높이 쌓여 있다. 그런데 그것들 하나하나 다 짚고 넘어가자니, 기운 없이 웅크려 있는 내 지금의 모습이 너무 가엾은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20대인데, 아직은 즐거운 것을 보며 따라 즐거워할 줄 아는데, 너무 멀리 있어 점으로 보이는 걱정까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느라 당장 앞에 있는 나 자신에게는 그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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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십여 년 동안 삶의 뒤에 붙은 괄호를 잿빛의 단어들로 메꿔왔던 이상, 이미 삶마저 잿빛으로 창백하게 물들어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하고 있는 이 생각이 당장에 나의 삶을 새롭게 물들일 수 없을 것임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속는 셈 치고, 이번은 내가 정말로 달라지는 그 첫 순간이 되지는 않을까 못 이긴 척 믿기로 해보았다. 혹여 시간이 지나 오늘을 떠올려보았을 때,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긴 할 것이다.


요즘은 잠을 자기 전마다 시트콤을 한편씩 본다. 추억의 시트콤이지만 내가 짓는 웃음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시트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힘든 삶 속에서도 각자의 괄호를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결말에는 결국 그 괄호에 자신의 희망을 채우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 시트콤을 보며, 내 삶도 저 시트콤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러나저러나 시트콤에서 그들의 삶은 결국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실제 삶은 시트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내 삶의 괄호를 해피엔딩으로 채워줄 작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시트콤에 등장하는 그 인물들처럼 살아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채우고 싶은 희망을 가슴속에 보관하고 있는 그들처럼, 나도 내 가슴속에 좌절만이 아닌 희망을 위한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해 두고 다닌다면, 나도 그 사람들처럼 매일 웃으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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