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 5년차에 다음달 곧 태어날 아이가 있는 35살 가장이다.
마케터로써의 또 다른 도전과, 아이의 아빠가 되는데 더 큰 지출이 있을거라 생각해,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기로 마음먹고 높은 연봉과 좋은 직무를 제의한 유럽 회사로의 입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의 면접은 몇차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의 최고 책임자들과의 면접에 꽤 까다로운 질문과 과제들을 해결하며 나름 어려운 관문들을 헤치고 면접에 합격했던 차라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고, 그 회사가 정말 잘 성장하고 있다는 믿음도 얻게 되었다.
잘 다니던 회사는 아름답게 마무리를 하고, 새로운 회사로의 출근까지 약 3주가 남은 기간동안은 내 개인적인 일들도 처리하고, 가족들 얼굴도 보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나, 우리 부부의 새 아이의 출생이 한달 남짓 남은 기간이라 와이프 케어에 힘을 쓰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출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고향집에 머물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삶이 행복해도 되나?"
가정적으로, 회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행복이 충만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 행복이 깨질까 두려울 정도였다.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내며 입사 이틀 전이 되었고, 아시아 담당 매니저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해줄 말이 있다는 메세지도 함께 남긴걸 보곤, 당연히 입사 전 간단한 회사 소개 및 입사일에 진행될 프로세스를 설명 할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근무여부를 한번 더 노파심에 확인하기 위해 연락을 했으리라 생각했다.
몇 분이 지나 왓츠앱으로 전화가 연결되었고 통화가 시작됐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하곤, 매니저는 바로 본론을 말했다.
매니저 : "사실..어제 긴급 임원미팅이 진행됐고, 글로벌에서 여러 직무들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 중 당신이 일하기로 한 직무도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사람이 갑작스럽게 충격을 받고 쓰러지는 장면들을 본 적이 있다. 마치 그 장면처럼, 갑자기 눈이 멀고 머리가 멍해지듯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당황한채로 매니저에게 답했다.
딱총 : "우리는 이미 근로계약서에 사인도 끝난 상태입니다다. 한국 근로기준법상 말이 안되는 얘깁니다."
매니저에게 항변하자, 매니저는 "어쩔 수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다. 바꿀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갑작스러운 해고통보에 정신이 아득해진 나는 일단 전화를 끊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말했다.
딱총 : "이건 엄연히 위법입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고, 내 출근은 이틀 남았습니다. 알고 있죠? 일단 당신이 한 말이 뭔지는 알겠습니다."
내 대답을 듣고는 매니저는 갑자기 톤을 올리며 "Are you okay?"라고 물었고, 내 상태를 묻는다고 생각해 일단 전화를 끊기 위해 '오케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매니저는 바로 나에게 "HR과 Legal에 내 상황을 얘기한 다음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짧은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직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지만 방금 통화에서 매니저의 태도가 이상했음을 느꼈다. 뭔가 내 해고를 빠르게 하려는 느낌, 어떤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았고, 특히 공식적인 이메일이 아닌 글로벌 카카오톡과 같은 왓츠앱으로 내게 연락한게 찝찝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매니저의 질문에 내가 뱉은 '오케이'를, 매니저는 HR과 Legal에 이 한국 지원자는 해고에 대해서 '오케이'했다고 말하고 해고처리를 빠르게 처리하려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해고통보는 통상적으로 HR과 상의하는게 맞고, 직접 매니저가 말을 하더라도 HR이 무조건 관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바로 왓츠앱으로 나의 해고는 부당하다는 메세지를 남겼다.
"나는 이 해고절차를 납득할 수 없다. 당신과 화상으로 대화 하고싶다."
내 메세지를 읽은 매니저는 답이 없다가, '오케이'라는 짧은 답장과 함께 약 2시간 후 화상 미팅을 진행했다.
나는 다시 한번 이 해고가 부당함을 말했다. 이 통보는 한국 노동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나는 이미 퇴사를 한 상태이므로 복직도 안되는 실직상태가 되고, 경제적 손실도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러자 매니저는 고개를 몇번 끄덕이고는 무언가를 적더니 "다시 HR 과 Legal에 얘기하고 알려줄게." 라는 말을 뱉고 짧은 대화를 마쳤다. 이 매니저가 나의 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혼란은 더 가중되고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렸지만, 매니저의 연락은 오지 않았고 난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 몇시간 뒤, HR에선 나의 곧 있을 입사를 축하한다는 웰컴 메일과 함께 회사 내부망에 접속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메일을 함께 보내주었다.
'매니저가 HR, Legal과 나의 해고를 취소하기로 한건가?'
나는 매니저에게 현재 내가 내부망에 접속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위해 내부망에 접속한 화면을 캡처해 보내고, 그에게 답장을 기다린다고 메세지를 보냈다. 내 메세지를 읽은 매니저는 답이 없었다. 그때부터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HR은 나의 지금 이 부당해고 상황을 모르는게 아닐까? 그러면 매니저는 HR과 얘기를 하지 않고 누구랑 얘기를 한다는거지?'
급히 메일리스트에 있는 HR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방금 나는 HR의 웰컴 메일을 받았고, 동시에 나의 채용에 관해 불안한 소식을 들었다. 지금 나는 매우 불안한 상황으로 HR은 근로계약서로 계약한대로 5월30일 근무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달라' 는 내용을 담았다.
누가 나의 편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머리는 더욱 혼란스러웠고, 무엇보다 현재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그 누가 이상황을 받아들이겠는가.
늦은 밤이 되도록 HR의 회신 메일은 오지 않았고, 난 뜬 눈으로 말 그대로 선잠을 자며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 부리나케 메일을 확인했다. HR의 답장이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딱총씨, 당신의 입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누가 당신의 채용에 대해 당신이 불안을 느끼도록 했나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말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HR의 답장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 현재 나의 매니저가 내게 해고 통보한 사실을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갑자기, 몇 분 지나지 않아 매니저로부터 HR과 대화를 하고있다는 연락이 왔다. 결론적으로, 어제 매니저는 HR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매니저를 믿고 HR에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면, HR은 내 해고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었을테고, 매니저는 어느 독단적인 루트로 나를 해고를 시키려 했을 것이다.
몇 시간 뒤, HR문의 메일에 참조로 넣은 HR 상사에게 답장이 왔다.
"딱총씨, 당신의 입사는 문제가 없습니다. 근무시작일에 대한 준비는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다음주 입사일에 뵙겠습니다."
메일을 보내준 HR상사는 아시아 인사 팀장급이었기에 마음을 놓아도 되는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 바로 몇 분 뒤 HR상사에게서 추가 메일이 왔다.
"딱총씨, 잠깐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이건에 대하여 더블체크를 한 후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기다림의 시간.... 곧 새로운 곳으로 입사하여 일할 생각으로 들떴던 내 얼굴은 2일 동안 흙빛으로 변했고, 1분의 시간은 1시간처럼 느껴질만큼 긴장되고 가슴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입맛은 진작에 떨어졌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메일을 나에게 보낸건 HR이 아니라 매니저였다. 매니저가 보낸 메일의 제목은 이러했다.
"고용 계약 종료 관련 통보"
왓츠앱으로 아무리 연락해도 답장이 없던 매니저는 내게 해고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해고 사유는 '대규모 경제 변화'로 인해 회사의 경제적인 이유로 나의 잡을 없애기로 했고, 이해해주길 바라며, 나의 이직을 돕고 복직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적혀있었다.
본인들이 어떻게 나를 구제하겠다는 내용이 아닌, '~~했으면 좋.겠.다'로 적혀있었다.
이 매니저는 회사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를 근무 시키려는 노력도 없이, 애초에 메신저와 화상회의에서도 나의 근무를 위한 다른 옵션 요청에 대해 "No" "It's impossible" 만 반복했기에, 어떠한 구제 조치도 없이 급하게 해고통보를 하려던게 맞았다. 실직 상황의 경제적 손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돕겠다는 내용도 없는 10줄이 채 안되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매니저는 나를 해고시킨 걸 독단적으로 끝내려는 듯, 수신자에는 내 이메일 주소만 있었고, 메일 참조에는 당연히 있어야할 HR도 넣지 않았다. 그리고 메일 내용에는 몇 차례나 "우리가 함께 협의한대로"라는 말을 넣어, 마치 내가 해고를 받아들이는걸로 해석되게 적어놓았다. 어지럼증에 다리에 힘이풀려 쓰러질뻔한 걸 의자를 잡아 간신히 버텼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부당해고다.
이 해고 통보를 받은 날은 우리 아기의 출산이 30일이 남아 "D-30일 파티"를 와이프와 조촐하게 하기로 한 날 이었다. 와이프와의 파티를 위해 비싼 돈을 들여 예약한 호텔에서, 전날 매니저에게 들은 해고 얘기로 혹시나 해 갖고 온 노트북으로 해고 메일을 받았다. 충격과 경황없는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 멍하니 노트북에 메일을 쳐다봤다.
띵~하는 알람과 함께, HR에선 추가 웰컴메일이 또 도착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이의 출생 30일 전날이자, 부당해고 1일차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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