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살, 나는 해고당했다.
어제 밤에 느꼈던 기분이 아침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떨리고 몸에 기운이 없고, 머리가 퀭한게 정신이 나간것만 같았다. 여전히 회사로부터의 메일은 와있지 않았다. 하....오늘도 시작이다..라는 우울한 감정이 또 한번 나를 감쌌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살면서 처음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기로 했다. 집 주변 여러 곳에 전화걸어 오후 늦게라도 진료가 가능한 곳을 찾았다. 우선 가기 전에 해둬야 할 일을 정리해보았다. 이직을 준비하는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무직도 아닌, 실직도 아닌 공중에 붕 떠 있는 나의 상태가 괴로웠다.
이렇게 된거 병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무언가 사람들이 많은 곳이 싫고, 누군가도 마주치기 싫은 기분이 강하게 들어 거리가 멀어도 걷기로 했다. 40분 여분을 걸어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선 처음 온 사람이 적어야하는 문진표를 작성하는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약 100여개 정도 되는 질문을 하나씩 체크하고 나니, 의사 선생님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00씨, 들어오세요."
처음 와본 정신의학과, 의사 선생님과 나 사이에는 코로나를 막기위한 플라스틱 판넬이 세워져있었다. 먼저 의사선생님이 내가 체크한 문진표 결과를 모니터로 보여주셨다.
"00씨의 심리 및 정신 상태를 확인해봤구요. 일반적으로 평소의 성격을 물어보는 질문들의 경우엔 우울증 환자들보다 낮은 수치라,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를 물어보는 질문을 보시면 우울증 환자분들의 평균보다 훨씬 높게 수치가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외상이나 외부의 자극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평균이상입니다. 이 가파른 그래프가 보이시죠?"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나는 이렇게 되버린 것이다.
"00씨, 혹시 요새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나는 차분하게 대답을 하려 했다.
"아 네 선생님, 제가 사실 며칠 전에 ..."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도 내 현재 무너진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위해 노력했던게 한순간에 무너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격해진 감정에 어린아이처럼 가슴을 헐떡이며 눈물을 닦기에 바빴다. 의사선생님도 놀라셨는지 책상위에 있던 티슈를 건네주며 내 울음이 그치질 기다려주셨다.
"후.. 사실 제가 며칠 전에 부당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충격이 많이 심한데요. 현재 저희 상황이.."
아내와 곧 태어날 아기가 생각나 또 말을 멈추고 눈물이 쏟아졌다. 의사선생님의 눈을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렸다. 의사선생님은 나를 조금 진정시키고는 진단을 해주셨다.
"지금, ㅇㅇ님의 마음 상태가 매우 위험한 상태에요. 중증 환자는 아니시지만, 평소 차분하시고 일을 잘 처리하시는 분들이 ㅇㅇ님처럼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으시면 이렇게 감정기복도 심해지시고 조절도 어려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뭔가 울음이 터지고나니, 어린아이가 부모님에게 따뜻한 말을 들었을 때처럼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약을 좀 처방해드릴게요. 강한 약은 아니니, 식후에 드시고 주무시기 전에도 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주에 한번 더 내원해서 상황을 보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왔다. 진료실 앞에 바로 세면대와 티슈가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준비되어있는 것 같다. 세수를 한번 하고 충혈된 눈을 티슈로 닦았다.
병원을 나와, 다시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지만, 누군가에게 내 감정과 속 얘기를 털어놓으니 조금은 마음이 나아졌다. 집에 도착해 간단히 요기를 하고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십여분이 지나고나서, 평소의 내 모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평소 생활의 내 모습이 느껴졌다. 그러자 아내가 떠올랐다.
'요 며칠간 사람같지도 않게 있던 나를 보고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신과 진료를 잘 받은것 같다. 조금 더 원래대로의 내 모습을 찾기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아내가 집에 도착했다. 조금은 밝아진 것 같은 내 모습에 아내도 기분이 좋아보인다. 내일 일은 내일에 더 열심히 하면 된다.
오늘은 아내와 밤 산책을 해야겠다.
부당해고 5일째 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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