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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온기 이야기 #3

주택 설계 다이어리

by 최소장
거실은 꼭 필요한가?


쓸데없는 상상인지 쓸모있는 고민인지 모를 생각들을 자주 한다. 물론 대체로는 쓸데없는 몽상으로 끝나지만 가끔은 쓸모 있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단독주택 설계는 사실 건축가 입장에서 보면 작업의 자율성이라는게 거의 전무한 편이다. 집을 의뢰한 사람이 살고 싶은 집을 최대한 만들어 가는게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 아무리 굿 디자인에 멋진 디테일을 가진 작품 같은 단독주택을 만든다 해도 거주자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건축가로서는 얼굴 화끈거리는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봉골레를 주문했는데 토마토 베이스의 링귀네를 요리한 느낌이랄까,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늘 그런 집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 다른 건축가들은 어떠신지 잘 모르겠지만 - 소심한 두려움을 갖고 산다. 설계 잘 풀린다고 행여나 정줄 놓으면 언제든 주문 사고난 파스타가 되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해서 의뢰인의 말과 생각을 그대로 도면으로 옮기는데 급급하지는 않는다. 그건 또 그것데로 좋은 설계가 되기 어려울테니까. 붕어빵 건물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찍어내도 상관없는 건축가가 어딘가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솔직히 그런 설계를 설계라 불러야할지도 잘 모르겠다. 설계는 의뢰인과 결과물의 중간에 존재하는 산물이다. 그 둘을 연결하는 역할을 건축가가 한다. 그래서 건축가는 어떤 면에서는 무색무취의 흐르는 물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주 작은 각도로 기울어진 물, 그런 물은 방향성을 갖고 알게 모르게 어떤 방향으로 흐른다. 건축가가 누군가의 집을 맡았을 때 제어할 수 있는 건축가의 의지나 방향성이란 그런 정도가 아닐까, 라는 기준으로 설계를 해나간다. 그럴 때 큰 무리 없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각도의 의지... 만으로 충분했다. 시작은 미미해도 시간과 거리가 길어지면 결과물에선 큰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 거실이 꼭 필요할까요? ’ 누가 먼저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대략 설계가 시작된지 두달 정도 지난 즈음에 이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앞서 말했지만 ‘온기’ 의 부부가 설계 조건에서 원한 건 자녀들을 위한 각각의 독립된 공간 - 그것도 전실과 침실로 나누어진 - 이었고 주방과 식당이 집의 다른 공간들과 독립된 방식이었는데, 그러면서도 면적은 60평 이내여야 했다. 온기 설계 초반 흐름이 느슨하게 꼬여버린 매듭처럼 점점 조여들어가는 중이었는데, 엉뚱한 질문 하나가 갈림길에서 서성이던 설계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서구의 거실과 달리 동양에서는 원래 지금의 리빙룸과 정확히 일치하는 공간은 없었다. 한국은 대청이나 사랑채가 휴식과 접객, 제례까지 다목적으로 쓰여졌고 굳이 비교하면 유럽의 살롱과 파를러의 역할과 비슷했다. 중국은 ‘탕(堂, 메인 홀)’이 가족 모임 공간이었는데 유교적 예법을 반영한 서열순 좌석 배치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다다미방(和室, 와시츠)’이 거실과 비슷한 역할로 특히 ‘도코노마(床の間)’라는 방은 손님 접대와 가족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현대적 리빙룸 개념이 거실로 주택에 정착된건 대략 19세기 후반, 당시 세기말 전환기 였던 유럽은 자본계급과 중산층이 많아지고 이런 저런 신기술이 발명되면서 라이프 스타일 혁신기였다. 거실은 중세 이후 수백년간 귀족과 부유층 주택에서 살롱(Salon)과 파를러(Parlor)로 분리되었는데 살롱은 주로 문화적 교류와 사교 모임을 위한 공간이고 파를러는 지금의 거실처럼 가족 휴식 공간이자 손님 응접실이었다. 그러던 거실이 20세기에 접어들며 현대의 리빙룸으로 대중화된다. 과거의 파를러(Parlor)에서 손님 응접실 역할이 점차 사라지고 일과시간엔 각자 할 일로 바쁜 현대사회에서 가족이 모이는 중심공간으로 자리잡았다. 딱히 기능이 정해져있지 않으나 꽤 넓직해야 될 것 같은 거실이라는 공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20180106_143808.jpg 물론 텔레비전이 중요한 집도 있다. 소파도 필요하고 남측 햇살도 필요하고.


우리들 머릿속에 내재된 거실의 이미지는 20세기 중반 TV가 등장하면서 부터다. TV가 보급되면서 거실은 전 세계를 막론하고 모든 가정의 티비룸이 되었다. 우리는 70년대 아파트 붐이 시작되면서 마찬가지의 상황이 되었는데 지금 누구나 생각하는 거실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가 이때부터 만들어졌다. 집의 중심에 넓은 거실이 있고, 큰 티비와 소파가 서로 마주보며 놓여진 풍경, 남향의 크고 긴 창은 볕이 충분히 들어오고 거실의 양쪽엔 방이 있고 거실과 마주보는 북쪽엔 주방과 식탁이 있는 중산층 주택의 전경. 사실 70년대 주택공사가 대량 주택 보급을 위해 만든 기본 LDK 3베이 아파트 평면이 만들어낸 이미지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 이미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그 공간이 편해서인지 좋아서인지 익숙해서인지 합리적이어서인지.. 이유가 뭐든 그 역시 나름의 타당한 삶의 선택이겠지만.


하지만 아파트에 십수년을 살다 단독주택을 짓는 상황이라면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구든 보편적으로 호불호가 크게 안 갈리는 집의 보편적 이미지를 벗어나 내가 원하는 집을 짓는 자유를 꿈꾸기 마련이니까. 거실 티비가 없고 소파도 필요없고, 각자의 독립적 삶을 존중하고 싶은 온기 가족에게 거실은 무엇일까? 막상 질문이 던져지니 건축가는 건축가데로 온기가족은 온기가족데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의외로 결정은 빨랐고, 온기가 일반적인 집과 미세하게 조금 다른 방향 - 아주 작은 각도로 기울어진 물처럼 - 으로 전개되는 시작점이 되었다.


‘ 소장님, 거실이 없으면 뭐가 좋아지는거죠? ’ 거실은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과 달리 한마디로 답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답을 만들어갈 수 있는 굿 퀘스쳔이다. 단독주택의 설계는 이런 궁금증과 호기심을 통해 서서히 우리가 원하던 그 집에 가까워지곤 한다. 5~6평짜리 거실이 없어진 면적만큼 다른 공간에 나눠 분산시키면 조금씩 큰 공간이 되겠네요... 라는 무성의하고 뻔한 답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으니 거실이 없다면 집이 어떻게 풍요로워 질수 있는지 건축가 입장에선 즐겁고 흥미진진한 고민의 시작이었다.


온기준공사진 : https://naau.kr/WORK/view/4974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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