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설계 다이어리
영산암
봉정사 영산암을 좋아한다. 절 같지가 않아서. 갈 때마다 느끼지만 영산암은 소박하게 가꾼 고택에 더 가깝다. 그것도 세도가의 고택이 아니라 세속을 벗어난 선비의 고택. 크고 작은 건물 여섯 채가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집이다. 집 입구의 누각 우화루와 그 맞은편 법당인 응진전, 응진전 앞 좌우 요사채인 송암당과 관심당, 응진전 왼쪽 삼성각과 염화실로 구성된다.
정원에서 전체를 둘러봐도 절 느낌은 없다. 흥미로운건 건물 모두 툇마루가 있다는 것. 특히 우화루의 이층 대청은 마당 좌우 요사채 마루와 수평을 맞추면서 툇마루와 연결된다. 툇마루에 앉으면 정원의 화초와 나무, 그 너머의 건물이 겹쳐지며 눈에 들어온다. 적당한 크기와 적당한 거리감은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되는데, 이런 연결 구조가 특유의 아늑함을 만든다.
배치는 집을 땅에 어떻게 앉히냐에 관한 것이다. 앉힌다는 의미는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리며 상상해보면 이해가 쉽다. 집 덩어리를 땅에 내려놓는다... 는 느낌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빈 땅 어딘가에 집이 될 만한 뭔가가 꿈틀거리며 싹을 틔우고 땅을 점점 조금씩 채워나가는 느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환대를 위한 ㄷ자집
땅을 처음 보러 갔을 때 서쪽 예쁜 동산 자락을 끼고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땅의 남쪽 시야 일부가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로 막히지만 서쪽으로는 시야가 열리면서 나무, 풀, 꽃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건축가가 뭔가를 일부러 그리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땅이 집이 앉을 자리를 알아서 그려주는 환경이랄까. 남쪽은 3층 높이 이웃집이 바로 앞에 있고 그 집 너머에는 아파트의 벽이니 볼 게 없는데 서쪽은 훌륭한 정원이 이미 만들어져 있으니 이걸 집으로 끌어들이면 좋겠다... 처음 갔을 때 땅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ㄷ자로 집을 배치하면 집 안과 집 밖을 함께 품을 수 있다. 집이 감싸는 마당을 보며 식당, 복도를 지나 방으로 들어가고 계단을 올라 테라스로 나가면 다시 마당이 보인다. 집은 크지 않은데 식당에서 내 방, 드레스 룸에서 별채까지 가려면 꽤 걷게 된다. 큰 집의 기준은 하나가 아니다. 규모 자체가 큰 집이 있고 집은 안 큰데 많이 걸어야 하는 집이 있다. 쓸데없이 긴 동선은 비효율이라 치부되지만, 동선에 의미가 생긴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걷다가, 쌓이는 눈을 멍하게 쳐다보고, 낙엽이 흩날리는 마당 앞 창에서 멈추고, 어느 봄날 볕이 집을 쓰다듬을 때는 몸으로 느낀다. 걸음을 옮기면 공간도 환경도 함께 움직이는 집인데, 그런 집은 대개 아늑하고 편안한 온기를 갖게 된다.
‘ 저희 거실 필요 없습니다 ’ 온기 부부의 결정이 설계에 날개를 달아준 후에도 혹시 몰라 ‘ 진짜 괜찮으신지 한번 더 생각해 보세요 마음 바뀌면 알려주시구요 ’ 두어 번 더 확인했다. 거실 대신 정원과 사람이 서로 환대하는 길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안과 밖이 하나처럼 느껴질수록, 많이 걷게 될수록 집은 더 풍요롭게 느껴질 것이다. 정원을 바라보며 서로 환대하는 영산암의 툇마루처럼 복도와 테라스, 계단을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방과 방을 연결하면서 집을 하나로 만드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생각했다.
집을 설계할 때 우리는 ‘방’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때론 방과 방을 잇는 ‘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온기가 그랬다.
온기준공사진 : https://naau.kr/WORK/view/4974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