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법
의뢰받는 집의 땅 대부분은 100평이 채 안된다. 땅이 시골이면 200평 넘는 땅에 짓는 집도 더러 있긴 했다. 시골로 가면 아무래도 땅 값 싸고 토지 구획 반듯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땅은 넓어도 집이 들어갈 자리는 한정적이라는 얘기. 시골인데 반듯한 땅은 대부분 토목회사나 시행회사가 임야나 농지를 주택용지로 변경하여 토지 분양할 목적으로 만든 땅들이다. 땅 사는 일반인 입장에선 골치아픈 개발행위 허가나 형질변경, 토목공사를 직접 안해도 되니 좋다. 게다가 땅까지 연결되는 포장 도로나 최소한의 하수도, 상수도 등의 설비가 해결된 상태면 더 할 나위 없다. 다만 신경쓸 일이 없는 땅일 수록 비싸다. 당연한 거겠지만.
작은 땅 큰 땅 기준이 뭔지 잘 몰라도 도시지역에서 단독주택 짓는 땅들이 대개 고만고만한 크기인 이유는 집짓 어려운 험지를 바로 집지을수 있게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토목 비용 때문이다. 택지 분양이라면 원래 땅 값에 토목 비용이 붙고, 적절한 마진을 붙여서 토지를 판다. 가장 잘 팔릴것 같은 가격대가 얼마인지에 따라 토목 공사 과정에서 필지의 개당 사이즈가 정해진다. 너무 크게 자르면 비싸서 안팔릴거고 너무 작게 자르면 싼건 좋지만 작은 집 밖에 안들어가니 안팔린다. 대체 얼마정도 크기가 적당한 크기인지는 지역마다 다르고 그 땅을 팔아야할 잠재 고객층의 스타일에 따라 다른데, 모르긴 해도 대략 50~100평 사이가 수도권 신도시지역의 단독주택 필지 적정 사이즈인것 같다. 왜냐면 지금까지 의뢰받았던 수십건의 신도시지역 단독주택들의 땅 크기가 대체로 그러했다. 그리고 이런 땅들 대부분은 지구단위계획 구역에 속해있었다.
신도시의 단독주택 전용지역은 필지들은 반듯한 형태에 면적은 70~80평 내외, 땅에 인접한 도로 폭 6~8미터로 균일하다. 땅 주변 도로들도 땅 모양에 맞게 반듯한 편이고 구불거리고 휘어진 길은 거의 없다. 땅 크기와 모양, 도로의 폭과 모양이 거의 동일하니 적용되는 건축법도 비슷한데, 아예 더 확실하게 하려는 추가 규정 같은 것도 만들어져 있다. 이런 규정을 지구단위계획구역지침이라 부른다. 지침의 취지는 이렇다. 이상하게 혼자 튀는 건물을 최대한 억제하고 지역과 도시 전체가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기 위해...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조화가 말처럼 쉽게 잘 될까.
단일 필지간 물리적 격차를 없애고 법도 최대한 동일하게 적용하면 비슷비슷한 모양의 집들이 나올것이다... 라고 누군가는 생각했다. 비슷비슷한 모양 집들이 수백채 어우러진 지역의 풍경이 그런 기준 없이 각 건물이 제멋데로인 풍경보다는 아름답지 않을까? 도시를 계획하는 입장이나 지역을 관리하는 관료의 입장이라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내 집을 짓기 위해 큰 돈을 써야하는 의뢰인과 그 집을 맡은 건축가의 입장은 좀 다를수도 있다. 동네의 미관과 풍경의 가치를 중시하는 그들만큼 이쪽도 만만치 않게 집과 돈, 투자의 가치에 대해 고민이 많을수 밖에 없으니까. 서로 중요시하는 가치는 인정 하겠지만 뭐가 중요하고 뭐가 덜 중요하고가 조금 다르다. 건축법을 바라보는 양측의 시각 차이랄까, 재밌는 건 이런 시각 차이 덕분에 재밌고 특별한 집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옴싹 달싹 못하는 상황일수록 더 그럴 가능성은 커진다.
상자에서 출발하기
설계가 시작되면 땅위에 상자 하나를 가상으로 올려놓아본다. 상자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규칙은 있다. 일단 땅의 경계선에서 건물이 이격해야 하는 거리가 있다. 신도시 지역 단독주택이라면 통상 1미터. 경계선 사방으로 다 떼어야 하느냐 하면 또 그렇진 않아서 도로와 접한 경계선은 이격거리가 없을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도로에서도 이격해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 무슨 일인지 그건 또 봐준다. 아마 옆집과의 경계선은 서로간의 영토분쟁 가능성 땜에 조금 떼라고 하는 것이고 화재시 피난 통로 역할도 해야하니... 그에 비해 도로는 공공 구역이므로 분쟁 날 일 없어서 그냥 도로에 붙여 집 지어도 된다는 것 같은데, 도로와 딱 붙은 집을 보면 좀 예의없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은 별로다. 물론 내 기분과 건축법은 별 상관이 없겠지만.
앞서 말했듯 구획, 면적, 모양, 체계를 균질하게 맞춰놓은 지역에서 법을 칼 같이 적용해서 짓게되면 옆집과 앞집과 내집이 뭐가 다를수 있는지 알수가 없게 된다. 아무생각 없이 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을 빨리 끝내자는 마음이라면 그렇게 될수 밖에 없는게 건축법의 힘이다. 하지만 운좋게 설계할 시간도 넉넉히 있고 나름 집의 가치와 건축적 성취, 하나의 작품....어쩌고에 대해 의뢰자나 건축가나 죽이 잘맞아 접근하게 된다면, 건축 설계는 흥미진진한 고난도 퍼즐이 되고 싸고 좋은것이 제일이라는 분들은 결코 이해할수 없는.. 시간많은 한량들의 지적 게임이 될수도 있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일단 땅위에 올려놓은 상자로 돌아가 법이 원하는데로 경계선에서 이격 거리를 떼어놓고 생각해봐야 한다. 어차피 집 규모와 허용 공사비는 정해져있으니 1~2층 총 60평 지을거면 상자 최고 높이는 박공 지붕을 감안해도 넉넉잡아 8미터면 충분하다. 게다가 지침엔 이미 층수 제한 2층이 친절히 적혀져있고, 북측 방향 일조권 사선제한 법령 따라 별도의 높이 규정이 적용되는 상황... 높이가 정해지면 다음은 건폐율50% 용적율100%. 이 비율은 꽤 강력한 기준이라 왠만하면 집의 물리적 사이즈가 정해져버린다. 역시나 시키는데로 땅 절반넘게 비우고 건물은 땅 면적의 절반 이하 면적으로 2층 올리면 용적율이 대략 100% 맞춰지는 계산은 거의 마무리 단계로.. 여기까지 별 생각없이 어어 하며 따라가다 보면 바로 설계가 끝나버릴수도 있다.
상자에서 출발해보는 이유는 이렇게 간단히 끝낼수도 있는 집이라는 걸 미리 알아보기 위해서다. 법에 충실하게 기계적으로 맞춰 설계하는 방법은 가장 기능적이고 시간상 효율적인 방법일텐데, 건축에선 이 효율과 향후 가치나 건축적 멋이 꼭 일치하지는 않다는게 체크 포인트다.
법과 상자가 만든 기계적 설계가 아니라면 이 땅에 어울리는 설계는 뭐가 있을지를 본격 고민하는게 진짜 설계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하는 편이다. 동탄 주택 무언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막 설계가 시작되고, 땅에 한번 가보고, 건축법을 검토하면서는 ' 으음.. 별 생각 없이 계속 가다보면 대략 이런 수준의 집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겠군 ' 하는 적당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게다가 클라어언트가 원하는 별표 5개짜리.. 특별한 요구사항도 있었으니.
무언가 준공사진 : https://naau.kr/WORK/view/5052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