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6.
나는 손이 두껍다. 보통 손이 크다고 하면 손가락이 굵고 긴 손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내 손은 그냥 짧고 오동통하고 두껍다. 어딘가에서 듣기론 이런 손을 ‘도라에몽 손’이라고 한다더라. 때문에 보통의 장갑이 잘 맞지 않고 늘 손가락이 남는다. 특히 가죽장갑 같은건 아예 쓸 생각도 하지 않는다.
고무장갑. 앞치마와 함께 명실공히 주부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생명력이 넘실거리던 어린 시절에나 장갑 없이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했지만, 30대를 넘어가자마자 주부습진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런데 문제는, 특대형 고무장갑이 잘 없다.
정확히는 있어도 다른 사이즈 제품보다 확연히 비싸다. 소모품이다 보니 대형마트에서 다량이 담긴 패키지를 사서 쟁여놓고 쓰는 편인데, 특대형은 이런 패키지도 잘 없다. 최저가와 가성비에 예민한 주부에게 이는 심각한 결격사유다.
왜일까. 아직 설거지하는 남성들의 개체수가 특대형 장갑의 생산량을 늘릴 만큼 충분치 않은 걸까?
어쩔 수 없이 중형 내지는 대형 사이즈 제품을 구매하여 사용하는데 끼기도 힘들어, 벗기도 힘들어, 벗다가 발라당 뒤집어지기 일쑤, 억지로 당기다가 북 찢어지기도 한다. 어쩔 땐 도움을 받아 간신히 벗기도 한다.
언젠가 뉴스에서 요즘 사람들 평균 신장도 커졌고, 가사노동에 참여하는 남성들도 늘어 싱크대 높이를 예전보다 높게 설계한다던데, 아직 한 번도 실물은 못 봤다.
애인님과 함께 장을 보러 가면 제품의 물색과 선택 등의 행위는 주로 내가 수행한다. 물론 최종 결재와 결제는 애인님이 하시지만. 하지만 판촉직원분들도, 가게 점원 및 사장님들도 항상 내 애인님께 우선 제품을 권하신다.
90년대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이다. 그 시절 남성중심적인 사회문화가 일하는 여성을 얼마나 차별하고 불편하게 했는지 수많은 증언과 증거들이 남아있다.
오늘 이 고무장갑을 보며 또 다른 형태로 남은 차별의 잔재를 생각해본다. 여전히 특정 영역이 특정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라고들 하지만 그 변화가 꼭 일률적이고 전면적이지는 않다는 불쾌한 사실.
물론 과대해석일 수 있다. 그냥 장갑이 작아서 불편한 걸 조금 과장해서 투덜거린다고 생각해주시길.
※ 오늘의 잘한 일
- 애인님 돌아오시기 전에 밀린 설거지를 해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