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5.
“와이프 친정갔다” 아직 공식적인 유부남은 아닌 내가 이 문장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다만 꽤 오랜 기간 애인님과 동거를 해왔고 보름에 한 번 정도 친정으로 귀가하시니 대략 간접 경험은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다만 이 상황이 뭇 유부남들에게 부러움을 살 만한 일인지는 시원스레 대답하기 어렵다. 우울과 싸우는 전업주부에게 자유는 곧 위기이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본가에 갔다고 하면 남겨진 자들은 대개 해방감, 자유, 일탈 등의 기쁨을 느끼며 동시에 이를 지나치게 티 냈다가 돌아올 후폭풍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모습 등을 보인다. 하지만 나는 되려 허허벌판에 혼자 선 것과도 같은 감정이다.
물론 자유롭다. 자유롭게 할 일 하고, 공부하고, 게임하고, 영화 보고, 드라마 보고, 낮잠 자고 등등. 하지만 자유라는 상황 자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통제, 제한, 억압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 나는 통제받고 있지 않기에 도리어 자유롭지 않다. 평일 중 가사노동에 투여하는 시간과 애인님의 퇴근 시간 이후 함께하는 시간은 통제라기 보기 어렵다. 가사노동의 부담이 그다지 크지 않고, 애인님과의 시간은 우울함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는 고마운 시간이다.
하지만 혼자 남게 되면, 자유의 몸이 되면, 많은 이유들이 사라져 버린다.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 제시간에 끼니를 챙겨야 할 이유, 영양소를 두루 갖춘 식사를 차릴 이유, 각종 집안일을 미루지 않고 해야 할 이유 등.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우울한 생각을 멈출 이유, 기운을 낼 이유가 사라져 버린다.
뭐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2박 3일 정도고, 게다가 난 원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인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음 뭐랄까. 허허벌판에 혼자 선 것 같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말이지.... 에어컨, 컴퓨터, 티비, 플스, 닌텐도, 소파, 식음료가 모두 갖춰진 허허벌판이랄까....? 이런 풍족한 환경에서 우울이라니... 이 정도면 우울이 사치 아닐까? 라며 어떻게든 차분히 지내보자고 생각한다.
언젠가. 바보같이 이날의 사치스러움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고 탄식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 오늘의 잘한 일
- 혼자서도 밥 잘 챙겨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