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4.
비교적 가까운 과거, 비자발적 전업주부로의 전직이 이루어지던 시기 자신이 우울한 이유를 스스로 분석해보려 애쓴 적이 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바로 자신의 헤테로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가족 모델이 제시되고 있다. 과거 경제활동에 전념하며 배우자와 자녀를 건사하는 가장으로써의 남성의 모델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정반대로 남성이 가사활동에 전념하는 모델도 흔하진 않지만 존재한다.
그러나 내가 사회적 성정체성을 학습하던 유아, 청소년 시기만 하더라도 그러한 남성은 무능함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기둥서방, 셔터맨 등 그 어원부터도 무척이나 성차별적인 단어들로 불리기도 했다.
다양한 삶의 형태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현재의 자의식과 달리 과거의 자의식은 자신이 무능하여 지금의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에게 삿대질한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헤테로 남성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나로서는 우울감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내 자의식에서 도려내야 했다.
내면의 수많은 욕구들 가운데 스스로 원하는 것과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것들을 구분한다. 사회적 욕구들 가운데 특히나 헤테로 남성성과 연관 깊은 것들을 꼽아 면밀히 살펴보고 대체하거나 폐기한다.
남성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싶다는 욕구, 배우자보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더 높은 수준의 지위를 획득, 유지하고 싶다는 욕구,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학습을 통해 내면에 자리 잡은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 따위의 이미지 등. 시대착오적이고 옳지 않은 것은 물론 현실의 나와도 맞지 않는 것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중 현재까지도 가장 결별하기 어려운 것은 ‘가능한 빠르고 쉽게 성공하고 싶다’는 욕구이다. 일확천금, 벼락부자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만 운과 안목이 모자란 것 같이 느껴지는 헛된 좌절감. 기타 등등이 모여서 스스로를 ‘무능한 헤테로 남성’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조금 늦었다 싶더라도 남은 인생이 더 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고,
다소 돌아왔다 싶더라도 앞으로의 한 걸음을 착실히 걸어 나가야 하고,
과거 내가 꿈꾸던 내가 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나은 나를 꿈꿔야 한다.
그래서 이 좌절감들을 씻어내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헤테로 남성성과 결별하려 한다.
오늘 아침 바깥양반의 출근길에 찍힌 사진이다. 헤테로 남성의 본능이 게으르고 나태한 자신을 한탄하는 한편, 우리 바깥양반께서는 이런 모습조차 귀엽다 해주신다(과연 내가 귀여운 것인지 나와 같은 자세로 드러누운 우리 작은 고양이가 귀여운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뭐... 일단 이걸로 된 거 아닐까. 여우 같은 마누라를 바라기 이전에 재주 잘 부리는 곰 같은 남편이 되어보자.
※ 오늘의 잘한 일
- 귀여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