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웅보 Aug 18. 2022

늦잠의 기회비용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2.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 늦잠의 기회비용       

   

나는 알람 등 외부의 요인으로 잠에서 깨는 것이 싫다. 괜스레 수면시간의 일부분을 빼앗기는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자연스레 잠에서 깨어 지난 밤 꿈을 복기하는 등의 나른함이 좋다. 그렇게 획득한 나른한 분위기 위에서 평온하고 느긋하게 조작하는 하루는 집돌이에게 휴일을 충실히 보냈다는 만족감을 준다. 그런 점에서 늦잠은 내 삶의 필수적인 의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만족감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휴일일 때의 이야기, 전업주부에게 늦잠은 기회비용의 박탈이다.     


가사노동도 분담이 되어있고 육아도 하지 않는 덕에 사실 전업주부로서 노동강도가 대단히 크지 않은 편이다. 덕분에 남는 시간은 오락, 공부, 운동, 취업 활동 등에 사용한다. 하지만 늦잠을 자버리면 이러한 활동에 사용할 시간이 줄어들어 버린다. 물론 이런 일들이야 하루쯤 미룬다고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매일매일 주어지는 가사노동이 우선이기 때문에 당위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내 기분에는 조금 문제가 생긴다.     


비록 전업주부라 할지라도 그 처지가 한시적(이라고 믿고 싶은), 비자발적인 탓에 가사노동 외의 부분에서도 매일매일 착실히 무언가를 쌓아 올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때문에 가능한 루틴을 지키며 하루를 보내려고 의식하는데 늦잠은 그 루틴에 공백을 만들어 버린다. 더군다나 늦잠의 원인이 고작해야 sns질, 잡스러운 글 읽기 등이라는 점에서 울적함이 더해진다.     


늦잠을 자면 늘 보이는 풍경


그리고 누구나 이쯤에서 예상할 수 있듯, 그래, 오늘 늦잠 잤다.     


눈을 뜨는 순간 늦잠을 잤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시계를 확인하며 심각성의 정도를 확인한다.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야 한다. 어차피 늦었는데, 라며 자조하다간 하루가 통으로 소모되어 버린다. 옆구리에 붙어 누워있는 작은 고양이도 달갑지 않고, 집사가 잠에서 깬 사실을 귀신같이 알고 달려오는 큰 고양이의 스킨쉽도 피하고 싶다. 보통은 기상과 즉시 바깥양반께 메시지를 보내어 문안을 올리지만, 이런 날은 늦잠을 잤다는 사실을 알리기 꺼림칙하여 차라리 연락을 잊은 척하기로 한다.     


침대를 벗어나자마자 끼니부터 챙긴다. 출퇴근 시간이 명확한 바깥양반과 반드시 저녁 끼니를 함께하기 위해 점심 끼니때를 반드시 동일하게 챙겨야만 한다. 간단히 끼니를 챙기며 오늘 계획되어있던 집안일들의 우선순위를 매긴다. 평소라면 다소 무계획적으로 수행해도 무관하나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다.     


그런데, 어, 어라. 오늘 할 일이 별로 없다. 어제 조금 부지런했던 덕에 오늘 할 집안일이 없다. 혹시 몰라 집을 한번 둘러본다. 청소상태 양호, 밀린 빨래 없음, 오늘 저녁 메뉴 역시 준비시간 짧음, 몇 가지 사소한 일을 제외하고는 크게 할 일이 없다. 어제의 부지런했던 내가 오늘의 게으른 나를 구원해주었다.     


긴장이 풀리고 잠시 맥이 빠져있었더니 하고 싶은 일들이 떠오른다. 우선 커피 한잔. 커피를 내리고 있었더니 보려고 생각했던 예능 프로가 생각났다. 아무리 여유가 조금 생겼다지만 이렇게나 허투루 하루를 보내도 될까 하는 걱정이 들려는 참에 바깥양반께서 오늘 저녁 외출을 권하신다. 하루의 완성이 그려진다

    

비록 하루의 시작에 위기가 있었으나 여러 요인 덕에 오늘도 비교적 충실하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정도의 하루가 구성되었다. 이 이상의 욕심은 우울감의 마중물이 될 수 있으니 자제하도록 한다.      


이제 곧 퇴근 시간이다. 주방으로 가자.          



※ 오늘의 잘한 일     

-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 커피를 맛있게 내렸다.     

이전 01화 더러워진 욕실로부터 회피하지 않을 결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