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웅보 Aug 18. 2022

더러워진 욕실로부터 회피하지 않을 결심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1.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 더러워진 욕실로부터 회피하지 않을 결심


방만하게 소모해버린 20대의 탓일까, 중구난방인 경력의 탓일까, 그도 아니면 코로나? 경제공황?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비자발적 전업주부이다.     


사실 그냥 백수가 아닌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나와는 달리 착실히 일상을 채워온 동거인이자 애인께서 생계를 책임져주시는 덕에 전업주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 자존감이 완전히 소실되는 위기만은 피하고 있다.     

하지만 우울감은 일상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파고든다. 돈 한 푼 못 벌어오는 주제에 혼자 있는 집에서 에어컨을 튼다든지, 무계획적으로 끼니를 챙기다가 버려지는 식료품이 생긴다든지, 밥 하기 귀찮은 날 배달비 때문에 결국 좌절하고 만다든지. 전업주부의 고단함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내게 주어진 유일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의 우울감은 자신을 무척이나 무기력하게 만든다.     


마치 오늘, 변기에 앉아 사색하던 중 저 구석의 한참이나 손을 닿지 않은 물때를 발견했을 때처럼.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경력이 길어지고 이런 우울감을 마주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어느 정도 노하우도 생기고 있다. 대체로 이러한 경우에는 스스로 위안 삼을 수 있고, 동거인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조치로 사태를 무마하였다가 후일 제대로 된 처리를 기약할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지금이나 후일이나 아무 일도 없긴 매한가지인데 당장 처리해버릴지를 결정하면 된다.     


사실 대게의 경우 선택은 전자였다. 일상의 무기력은 물리적 시간이 많을수록 오히려 결심을 미루도록 관성화되었다. 무기력을 극복하겠다는 결심은 언제나 그렇듯 승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날이니까. 글의 소재를 위해서라도 나는 오늘의 우울감을 극복하려 한다. 비록 비자발적인 전업주부이지만 오늘만은 욕실 청소를 훌륭히 해낸 전업주부가 되고 말겠다.     


자취생활 어느덧 십여 년, 가사노동 생산기술의 진보는 늘 새롭고 놀랍다. 당장 욕실 청소를 결심하자 언젠가 tv 광고에서 보았던 놀라운 도구들, 지난번 마트에서 유심히 살펴보았던 세제 등이 떠오른다. 사러갈까? 아니다. 그것들을 확보하고 이어서 청소까지 완료할 수 있을 만큼 내 동력이 넉넉지 않고, 이미 활용 가능한 자원들 또한 충분히 갖춰져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자원을 써보고 싶다는 이 욕구는 자신의 무기력이 오늘의 결행을 미루도록 하기 위한 더러운 수작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주어진 자원으로 오늘의 목표를 달성해내겠다.    

 

우선 다목적 세제를 곳곳에 뿌려둔다. 세제가 충분히 침투하는 것을 기다리면서 조금 더 시간을 번다. 그 시간 덕에 벌써 이만큼이나 글을 쓸 수 있었다. 이렇게나 뜸을 들일 필요는 물론 없지만, 결행하기로 마음먹었을 뿐 최단 시간에 해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니까. 동거인의 퇴근 전에만 마무리하면..... 되겠.....지...?     


타일 줄눈 칠해야겠다


마음을 다잡고 몸뚱이를 일으켰다. 역시 시작이 반....은 개뿔, 역시나 욕실 청소는 집안일 난이도 탑 티어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냈다 해냈어. 그래서, 이렇게 뭐라도 하나 해내고 나면 뿌듯해지는가? 울적한 기분이 좀 산뜻해지는가? 아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집을 대청소하고 기분까지 리프레쉬되는건 드라마 주인공의 전유물인가보다.      


이따금 우울감이 덮쳐올 때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달래줄 이유를 찾지 못해 허덕이곤 한다. 그렇게 점차 자신을 우울함 속에 방치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욕실 청소 같은 일은 그저 매일매일 뚝방을 보수하는 일에 가깝다. 아직 딱히 자신을 북돋아 줄 명분까지는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고 사소하게 칭찬받을 일을 꾸역꾸역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이다. 이 일기를 습관으로 하여 칭찬거리이자 글 쓸 거리를 만들 동력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 와중에도 큰일하고 기운이 빠져서 정작 매일 해야하는 청소, 분리수거, 설거지를 하지 않아 또다시 스스로를 깎아내릴 뻔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본인 퇴근하고 같이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애인이 있다. 오늘도 가까스로 우울함에 허덕일 시간을 삭제해보았다.     



※ 오늘의 잘한 일     

- 욕실 청소를 결심하고 그날 바로 해치웠다.

- 첫 글을 완성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