넴릿
중학교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닭'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닭'을 ‘닥'이라고 발음한다. ‘ㄹ'은 발음되지 않아도 그 글자를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자음이다. 그것이 소리 나지 않는 묵음이라고 배웠다. 나는 문득 내가 그 묵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에는 수업 시간 내내 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선생님의 입술, 귀 기울여 들으며 교과서에 선생님이 설명한 내용을 필기하는 반 친구들의 쉼 없이 반짝거리는 눈,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질문하려고 손을 번쩍 드는 모범생, 뒷자리에 앉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막 웃고 떠드는 날라리 몇몇으로 가득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날이면 날마다 반장이 의자에 일어나 칠판 앞으로 가서 지우개 두 개를 양손에 쥐곤 했다.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나는 칠판에 쓰인 글씨만 뚫어져라 보면서 반장의 손보다 재빠르게 베낄 수밖에 없었다. 방과 후 집에 와서 복습할 때 개발새발 그린 글씨를 읽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리기도 했다. 보이지만 들리지 않는 묵음처럼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지만 발음되지 않는 자음 같았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밖에서도 존재하고 있지만 발음되지 않는 듯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 사무실에서는 수많은 입술이 분주히 움직였다. 상사와 동료들의 터지는 웃음, 복도를 지나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에서 스치는 잡담. 그것들은 이제 내게 닿지 않는 소리가 되었다. 수어로 통역하는 근로지원인이 그만두면서 내게 들어오는 정보의 창이 하나 줄어들었다. 동료들이 웃을 때면 나도 따라 웃었지만 무슨 일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동료들과 함께 창가에 있는 자리를 잡고 일렬로 같은 간격을 두고 나란히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고 지내다 보니 입과 턱 근육을 쓸 일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식사 속도도 더뎌졌다. 동료들처럼 10분 만에 후다닥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런 속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기는 귀찮아서 나는 치아 교정 중이라 천천히 먹어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동료들은 그런 줄로만 알고 식사를 마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나는 그들이 먼저 일어나기만을 내심 기다렸다. 그렇게 되면 나는 혼자만의 식사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청청한 가을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씹고 음식의 맛과 향에 집중하며 홀로 식사하는 시간이 좋았다. 테이블 위에 오가는 대화 속에서 머쓱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입 모양을 읽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입 모양을 읽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음식물을 봐야 하는 상황이 민망하지 않아도 됐다. 식사 후에 휴게실로 가는 시간도 그랬다. 불 꺼진 휴게실에 난방을 켜고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덮고 누우면 세상의 모든 소리와 동떨어진 것처럼 평온했다.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내 발끝을 간지럽힐 때면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요 속에서 나는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만큼은 발음되지 않아도 좋았다.
평화는 오후 한 시까지였다. 퇴근길에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동료들과 함께 가는 대신 혼자서 핸드폰을 보며 걷는 것이 더 편했다. 하지만 가끔은 야속하게도 외로움이 불쑥 나타나기도 했다. 지하철 출입문을 오랫동안 닫히지 않은 채 정차해 있을 때였다. 분명 안내방송이 나왔을 텐데 나는 가만히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별 실속이 없는걸 알면서도 '3호선 지연'이라고 검색해 보지만,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핸드폰 화면을 아무리 위로 계속 쓸어올려도 관련 뉴스 기사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텅 빈 화면을 본 순간 나는 또다시 묵음이 되었다. 거리가 꽤 되는 집까지 자전거를 탈 때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곤 했다. 뒤에서 차가 오고 있을까 봐, 옆에서 고양이가 나타날까 봐, 앞에서 갑자기 어린이가 달려올까 봐. 늘 온몸의 감각으로 주변을 살펴야 했다.
집에 돌아올 때면 고요함이 나를 반겼다. 다른 이들에게는 적막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순간이 내게는 오히려 위로되었다. 종일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진정한 나로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이었다. 소파에 기댄 채 베란다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파트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팟'이라는 글자들이 아파트를 채우면서 반짝이고 있다. 어릴 적부터 만화책을 즐겨 보며 자랐다. 보청기를 쓰지 않은 나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의성어로 바꾸어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입 모양을 좇느라 눈이 피곤해질 때면 잠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바람에 흔들려 어물거리는 나무들 위에서는 ‘사락사락', 농구공이 바닥에 부딪히는 모습에서는 '통통', 운동장에서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축구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에서는 '와다다다'라는 글자가 보였다. 교실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분필이 칠판에 닿는 순간 '치직치직', 지우개로 칠판을 지울 때는 '쓱쓱', 옆자리 친구가 지우개를 털 때는 '탁탁'이라는 글자들이 춤추듯 떠다녔다. 그렇게 나는 소리들을 듣지 않고, 보았다.
사무실 안에서도 의성어들은 끊임없이 나를 찾아온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타닥타닥', 프린터에서 종이가 나오는 '슈욱', 누군가 커피를 마시는 '후루룩', 의자 바퀴가 굴러가는 '끼익끼익', 서류를 넘기는 '바스락바스락'까지. 내 앞에서 누군가 걸어갈 때면 '저벅저벅'이라는 글자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옆자리에서 동료가 밥을 먹을 때면 '쩝쩝'이라는 글자가 그의 머리 위를 맴돈다. 종이 무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는 순간에는 '탁'이라는 글자가, 동료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때면 '하하호호'라는 글자가 공간을 채운다. 집에 갈 때도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마다 '찌그덕찌그덕',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쌩쌩', 낙엽을 밟고 지나갈 때면 '바스락바스락'이라는 글자들이 내 주변을 맴돈다. 의성어들이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들을 글자로 그려내며 세상의 소리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글자로 보는 또 다른 자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