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by 정관영

인류는 지금껏 수많은 기술적 특이점을 지나왔지만, 인공지능(AI)이 몰고 올 변화의 파고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근본적입니다. AI는 인류의 지적 능력을 증폭시키는 가장 강력한 '가속기'로서, 생산과 안보, 금융 등 사회 전 영역에 걸쳐 기존의 모든 질서를 재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이 무한한 증폭의 힘이 통제되지 않을 경우, 인류가 쌓아 올린 공동체의 가치를 위협하는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법(Law)의 역할이 있습니다. 법은 공동체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제어장치'이자,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가치와 절차를 담아낸 운영체제(OS)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류는 AI라는 가장 강력한 가속기와 법이라는 제어장치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 속에서 미래의 경로를 탐색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긴장은 국가들 간의 '거대한 체스게임'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AI' 기술의 우위 및 그 기술을 규율할 '규칙'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입니다.


'법'의 프리즘으로 AI 패권 시대의 체스판 읽기


이 거대한 체스게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체스의 주요 플레이어와 체스판 위에 놓인 기물들의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체스게임의 주요 행위자는 단연 미국, 중국, 그리고 유럽연합(EU)입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AI 기술의 우위와 그 기술을 둘러싼 '게임의 규칙'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혁신 기술과 자본을 통해, 중국이 국가 주도의 거대한 내수시장을 통해 기술 패권을 추구한다면, EU는 강력한 규제 권력을 통해 글로벌 표준을 자국에 유리하게 설정하려 합니다.


결국 이 게임의 최종 목표는 '패권(Hegemony)'의 장악입니다. 국제정치경제학자 수잔 스트레인지는 구조적 권력(Structural Power)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구조적 권력이란 ▲안보 구조(누가 누구에게, 어떠한 위협에 대응하여, 무엇을 대가로 안보를 제공하는가), ▲생산 구조(무엇을, 누구에 의해, 누구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 어떤 조건 하에서 생산할 것인가), ▲금융 구조(누가 신용을 창조하고, 상이한 화폐나 통화 간의 환율을 결정하는가), ▲지식 구조(어떤 지식이 발견되고, 어떻게 저장되고, 누가 의사소통 수단을 접근하거나 통제하는가)라는 네 가지 영역의 규칙과 틀을 결정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AI는 이 네 가지 구조를 모두 뿌리부터 뒤흔드는 '게임 체인저'입니다. AI는 자율살상무기와 사이버전 능력으로 안보 구조를 재편하고, 스마트팩토리와 공급망 최적화로 생산 구조를 혁신합니다. 메타버스와 가상자산을 엮어냄으로써 금융 구조를 혁파하며, 데이터 분석과 정보 전파 방식을 바꾸어 지식 구조의 핵심으로 자리 잡습니다. 결국 AI 시대의 패권 경쟁은 'AI'라는 증폭기를 활용하여 이 4대 핵심 구조에 대한 통제력을 누가 더 효과적으로 확보하고 그 '규칙'을 자국에 유리하게 설계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복잡한 체스게임을 '법'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보아야 할까요? 법이야말로 국가의 전략적 의도와 권력의 작동 방식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는 해독기(解讀器)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엔티티 리스트(Entity List)'와 같은 수출 통제법은 기술 보호를 넘어 중국의 AI 굴기를 억제하려는 안보 전략의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EU의 GDPR(일반 개인정보보호법)은 인권 수호라는 명분과 함께, 미국 빅테크 기업을 견제하고 자국의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려는 정교한 경제·규범 전략입니다. 이처럼 법은 각 플레이어들이 어떤 규칙으로 싸우고 있으며, 그 규칙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AI 시대에 국가와 시민이 '주권'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 이 체스게임의 승패에 '주권'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의 CEO 알렉산더 카프입니다. 그는 미국의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이 세계 평화와 "서구 민주주의" 가치 유지에 필수라고 주장하면서, 군사 인공지능 분야를 국가 안보의 새로운 전장으로 간주합니다. 카프는 정부와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이 협력하여 새로운 "맨해튼 프로젝트"와 같은 AI 기반 방위 기술 투자를 해야 미국의 지정학적 경쟁자들의 군사 혁신에 대응하고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궁극적으로 서구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념적 주저함'을 극복하고 전쟁의 미래에 투자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그의 주장에서 AI가 야기할, 핵폭탄보다 무서운 가공할 파괴와 혼돈에 대한 성찰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직 서구 사회의 적들(adversaries)이 AI를 군사무기화하고 있으므로 주저하지 말고 이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뿐입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카프의 주장이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맞닿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두 국가 간의 싸움은 AI에서 결판이 날 것입니다. 패권 즉 구조적 권력과 하드파워, 소프트파워의 증폭 엔진이 AI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중국 모두 AI의 파괴력을 절제하거나 AI 군비 경쟁을 감축할 의향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굴종 또는 지배라는 양자택일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거대한 흐름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디지털 시대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AI 시대의 주권은 영토를 넘어 '데이터 주권'과 '알고리즘 주권'으로 확장됩니다. 자국의 데이터를 스스로 통제하고,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알고리즘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으며, 자국의 가치와 이익에 부합하는 기술 규범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새로운 주권의 핵심입니다. 거대 기술기업이나 패권 국가가 설계한 AI와 플랫폼, 그리고 그들이 만든 규범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앞으로 연재할 내용은 AI 패권 경쟁의 작동 원리와 규칙을 해부함으로써, 우리가 체스판 위의 말이 아닌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플레이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쓸 것입니다.***** 저와 함께 AI가 촉발하는 지정학적 경쟁을 법의 프리즘으로 추적해 봅시다.


* 수잔 스트레인지는 구조적 권력을 '세계정치경제의 구조를 형성하고 결정하는 힘'이라고 정의한다. 그녀는 구조적 권력은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분리되지 않는 상호 연관된 구조라고 한다. 수잔 스트레인지 지음, 『국가와 시장』, 양오석 옮김, 푸른길, 2005, 49-52쪽 참조.

** 수잔 스트레인지 지음, 『국가와 시장』, 양오석 옮김, 푸른길, 2005.

*** Alexander C, Karp and Nicholas W. Zamiska, 『The Technological Republic』, Crown Currency, 2025, pp29-31.

**** 미국은 2019 회계연도 국방수권법 제1051조에 의해 의회 산하에 설치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NSCAI)를 설치했다. 동 위원회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AI 기반 기술에 관하여 ‘이는 중국의 활동반경을 훨씬 넓히고 있고, 마치 중장거리 미사일과 테러를 통해 미국 본토를 직접 위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였다. 미국 인공지능국가안보위원회, 『백악관 AI 리포트』, 정승욱 편역, 쇼팽의 서재, 2021, 28쪽.

***** 수잔 스트레인지는 네 가지 구조적 권력으로 안보구조, 생산구조, 금융구조, 지식구조를 규정하면서 부차적 권력구조로 운송체계, 무역, 에너지, 복지를 든다. 필자는 수잔 스트레인지의 권력구조론을 참고하되, 최근 국제정세가 미국이 고립주의 전통으로 회귀하는 대전환기인 점을 감안하여 스트레인지가 부차적 권력으로 언급한 운송체계와 무역, 에너지를 패권의 주요 요소로 편입하여 다룰 예정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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