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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끼 Nov 14. 2023

아빠 마음으로 뭘 할 수 있는데

이혼 후 감정과 연민에만  사로잡히지 말기


이제는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일요일마다 아이를 보고 다시 엄마한테 데려다 줄 때면

아직도 마음이 시큰하고 헛헛해진다.


아이랑 조금 활동적으로 놀았던 날이면 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이내 잠이 들곤 하는데

잠든 애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안 해도 될 고생을 시키고 있다는 자책감도 스며든다.


매일 이 귀여운 얼굴을 보고 살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내 삶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애 엄마랑 함께였을 때 시들어 갔던 내 모습이 떠오르며 본능적으로 몸 서리가 쳐진다. 

억지로 완성형 가정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속으로는 분노하고 불행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오히려 아이한테 온전한 아빠의 모습을 보이며, 행복하고 건강한 아빠로 기억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

한 번은 애한테 아빠랑 떨어져 있어도 아빠가 항상 OO이 생각하는 마음 알지?
이랬더니, 9살짜리 아이가 하는 말..  
마음이 먼데? 마음으로 뭘 할 수 있는데?
아빠 마음으로 나 어제 토요일에 누구랑 놀았는지 머 하고 놀았는지 알 수 있어?
몇 시에 잤는지 알 수 있어?


아 맞네 그렇구나. 딸을 생각하면 항상 안쓰럽고 미안했었는데

오히려 그 마음에만 사로잡혀 스스로 연민에 빠지고 눈앞에 해야 될 일들을 외면한 거 같다.

그럴 시간에 전화라도 한 통화 더 하고, 만나서 놀 때 조금 더 최선을 다할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생각해 보고 그래도 행동하고 더 집중하면 되는 걸 잡생각에만 사로 잡히지 않았나

곱씹어 본다. 


어느 심리학과 교수가 말하기를 관념 속에만 빠져 사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런 거 같다. 이혼 후에 틈만 나면 감정과 관념에 빠져버려서

머릿속은 복잡한데 정작 난 우두커니 서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음으로 뭘 할 수 있냐는 아이의 반문을 듣고 난 후부터는 매일 퇴근 후에 딸아이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좀 어색했지만
한 달쯤 되어가니 서로 익숙해져서 이런저런 일상적인 것들을 이야기한다.
끊을 때는 꼭 사랑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아무리 초라한 배역을 맡아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데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면 더 기쁜 날이 오겠지.

그리고 지금 삶이 꼭 나쁘지도 않은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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