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사줌마 Aug 09. 2024

중년 5. 우리 인생이 신파가 되는
   순간을 넘어

비극을 만날 때

내 또래를 만나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흔히 "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가 튀어나오는 지점이 생긴다. 

그러면 너도 나도, 너나 할 것 없이 시댁 배틀, 남편 배틀, 자식 배틀이  이어진다. 그러다 정상에 다다르면 잠시 정적이 흐른다.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쏟아놓은 말들로 자신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새삼 깨닫고는 하나둘 다른 감정으로 하산하게 된다.


이야기를 끝낸 비운의 주인공들은

 ' 난 지지리도   ...' 의 한탄의 길로,

 ' 그래도 내가 좀...' 이라는 위안의 길로

 ' 괜한 말을...' 하며 후회의 길로

각자의 길을 가슴에 품고  모든 원흉의 무대(집... 또는 外)로  향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의 신파에 열중한다.


 신파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신파극이 들어 와 차차 한국적 애환으로 개량된 신파가 동양극장이 세워지면서 유행하지만 광복 후 왜색으로 치부되어 쉽게 소멸한다. 

 시대의 아픔과 시대의 고뇌가 담겼을 장르가 비극이란 장르의 장수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명한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울다지쳐 쓰러지기만 했기 때문이란 개인적 생각이다. 


비운의 주인공들이 배틀(battle) 수다를 끝내고 귀환을 해도 그 잔재로 기분이 더욱 꿀꿀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이유가 신파의 단명 이유다. 이런 배틀 수다는 넋두리도 될까 말까다. 넋두리야말로 독백의 혼이다. 자신 감정의 우물을 파내는 작업이다. 그러니 살아온 삶의 깝깝함을 풀자면 신파보다는 넋두리가 훨씬 개운하다. 


비운의 배틀 주인공들이 찝찝함을 없애려면 신파와 넋두리를 지나 비극이 재격이다. 

오이디푸스가 신탁으로 인생을 망쳐서 비극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오이디푸스는 ~ing, 인생 진행형에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고 살았다.

처음에야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아오지 못하게 발목이 꿰어져 상처를 갖게 되고 

신탁이라는 유혹에 휘둘린 선택은 스스로 굴레를 만들고 불안을 만들지만 

그 순간 순간 그는 그 신탁을 빗겨가기 위해 선택을 하고 또 다시 선택을 한다. 결국 굴복하기 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스스로 찟는 선택으로 자신의 의지를 형형한다. 

삶의 치열함이 비극인 것이다. 

신파는 울다 지쳐 소진하지만 비극은 또다른 의지를 만들고 자신을 살린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이 아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4대 비극에 속하지 않는다. 

즉 사랑하다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극은 살아가는 중인 모든 인간의 삶의 형태다. 개개인이 크고 작은 것들에 대한 욕망과 갈망과 질투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비극의 무게가 정해지고 그 곳이 무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운의 배틀 주인공들이 자신의 황망한 삶의 무대가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흐느끼는 손수건짜리가 아니라 두 눈을 찔러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가는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를 손에 쥔 오이디푸스처럼 재생에 주인공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내가 지향하는 중년의 삶이기도 하다. 

이전 04화 중년 4. 아침 찌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