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기운에만 열리는 관계의 문
그는 왜 술을 마셔야만 다정했을까.
맨정신의 그는 무뚝뚝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조차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면 달라졌다.
말이 많아졌고, 웃음도 많아졌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그 감정은 내 것이 아니라, 술의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함이라고 생각했다.
연애 초반의 서툼.
낯설고, 서로의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약간의 거리감.
그런 거겠거니 했다.
그는 말수가 많지 않았다.
함께 있어도 공기를 메우는 건 주로 내 몫이었다.
내가 질문을 던지고,
웃음을 만들어내고,
리액션을 채우면 그제야 분위기가 풀렸다.
나 혼자 조금 분주한 연애였지만,
그건 그저 ‘내가 더 표현하는 사람이라서’라고 넘겼다.
첫 데이트가 아직도 기억난다.
네 시간 가까이, 나 혼자 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가 무뚝뚝했거나,
대놓고 시큰둥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침묵할 줄만 알았고,
그 침묵을 끝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질문 하나, 리액션 하나,
내가 건네기 전까진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을 맞추고,
내 말을 들으며 가끔 웃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서툴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을 마신 날엔 달랐다.
그가 웃었다.
먼저 말을 걸었고, 가볍게 장난도 쳤다.
말끝마다 나를 보며 웃었고,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손을 잡았다.
그 다정함은 술이 있을 때만 꺼내졌다.
처음엔 그걸 반가워했다.
“술 마시면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구나.”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이 원래는 있는 감정인데,
평소에는 표현을 못 하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정함을,
술기운에 빌려서라도 꺼내주는 게 고마웠다.
형제들을 소개받던 날,
술 한 잔 뒤 골목에서 그가 말했다.
“오늘 고마워,” 그리고 내 어깨를 감쌌다.
가로등 아래 흔들리던 불빛 사이로 드물게 보여준 그 손길.
그 순간만큼은,
표현이 서툰 사람이 마음을 꺼낸 것처럼 느껴졌다.
한 번은 술에 살짝 취한 그가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아무 말 없이.
손바닥 안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빛,
조심스러운 손의 온기.
그건 단순한 스킨십이 아니라,
나를 ‘진짜로 바라보는’ 눈빛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감촉을 조용히 마음속에 보관해 두었다.
그날의 그 손길이, 그 사람의 마음이었기를.
확신은 없었다. 그래도, 그날의 공기만큼은 진심이었기를 바랐다.
연애 초반,
그가 내 감정을 진심으로 짚은 순간이 있었다.
내가 정말 힘들었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낸 날,
그는 술에 조금 취한 채 조용히 말했다.
“힘들었겠구나.”
많은 말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 말만큼은, 척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나는 그 진심에 너무 목말랐던 사람처럼
그 한마디에 마음을 내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점점 확실해졌다.
맨정신의 그는 감정을 잘 꺼내지 않았다.
말은 있었지만,
다정함은 없었다.
감정의 자리에 습관적인 말과 웃음이 있었고,
진심을 묻는 질문에는 늘 장난이나 침묵으로 피했다.
술을 마셨을 때만
부드러워지고 다정해지는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어느새 그런 장면을 기다리게 됐다.
술이 있으면 오늘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
술이 들어가면 감정도 따라 나올 거라는 믿음.
그렇게 우리는 점점,
‘술이 있어야 가까워지는 관계’로 굳어져 갔다.
그런 다정한 모습은,
맨정신의 그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나는 술 마셨을 때만 다정해지는 게 조금 서운해.”
그는 망설임 없이 말을 잘랐다.
“가족들이나 친구들한테 하는 거에 비하면,
너한텐 엄청나게 다정한 거야.”
그 말을 듣고,
내가 과한 걸 원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문제인가 싶었다.
나는 늘 맞춰주기만 한 건 아니었다.
서운한 건 서운하다고,
불편한 건 불편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언젠가 그가 마음을 꺼내주길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을 방어하기 위한 말들을 꺼내고 있었다.
사과도 아니었고, 개선의 약속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내 감정을 의심하지 말라’는 항변처럼 들렸다.
정작 나는,
그 다정함을 단 한 번이라도 믿고 싶었을 뿐인데.
표현은 장난처럼 섞였지만,
나는 그 속에 진심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정말 그렇게 배운 걸 수도 있다.
다정한 걸 창피해했는지도 모르고,
어릴 적부터 감정을 표현해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서 스스로 감췄던 걸지도.
아니면 애초에,
다정함이라는 감정 자체를 누군가에게 배워본 적이 없었던 건지도.
오래 지켜봤지만,
그 가능성들을 그땐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표현이 서툴러’라는 말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너머의 이유는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안다.
그 감정이 술의 것이었는지,
그의 것이었는지 끝내 알 수 없다는 걸.
확실한 건,
우리는 술 없이는 가까워지지 못했다는 사실뿐이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을 흉내 낸 외로움에 가까웠다.
서로를 껴안은 게 아니라,
서로의 공허함을 안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그 장면들 속에서 사랑을 믿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우리는 애초에 어긋난 방식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그 감정은 너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