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랑했던 건, 나의 일부였다
그가 좋아한다고 했던 내 모습이,
어느 날부터 그에게는 불편한 것이 되었다.
변화는,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엔,
내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그는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다정한 말투, 살가운 태도,
그런 나의 결을 좋아한다고 했다.
친구들 앞에서
나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순간들이 있었다.
한 번은 택시 기사님께 인사를 건넸던 순간,
그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말을 참 예쁘게 한다며,
그 짧은 장면을 1년 넘게 기억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어른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을,
그는 ‘예쁘다’고 했고,
나는 그 말에서 존중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줄 알았다.
그랬던 그가, 같은 상황에서
“조용히 오고 싶었는데, 왜 자꾸 말해”라고 말했을 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먼저 말을 건 것도 아니었다.
택시 기사님이 인사를 했고,
나는 그에 응답했을 뿐이었다.
나는 물었다.
“예전엔, 그런 점이 좋다고 했잖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은 있었지만 회피에 가까웠다.
지금은 그냥 그런 기분이라고 했다.
그 말은 오래 남았다.
나는, 언제부터 이 관계가 이상해졌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택시를 타기 전까진,
우리는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그 말이 예고 없이 튀어나왔다.
공기를 순식간에 바꿔놓은 한마디.
말 한 줄이 이렇게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우리 집에 왔다.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나는 말을 걸었지만,
그는 “꼭 지금 이야기해야 해?”라고 했다.
“나는 멀티가 되는걸?”
분위기를 바꾸려 가볍게 웃어봤지만,
돌아온 건 조용한 한숨과, 굳은 표정뿐.
그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말을 삼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가 더는 예전처럼 마주 보고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는 내가 사람들과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따라 하려 했다.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내 태도를
종종 흉내 내기도 했다.
그게 나를 이해하려는 노력 같아서,
처음엔 반가웠다.
그는 말했다.
이제는 자기도 그렇게 해보려 한다고.
하지만 그는 감정의 ‘형태’만 흉내 냈을 뿐,
그 ‘결’에는 닿지 못했다.
그의 이해는,
결국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 안에
나를 가두는 일이었다.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그의 관심은, 자기 세계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만 머물렀다는 걸.
나는 그를 맞추려 억지로 나를 누르진 않았다.
오히려 다가갔고, 감정을 나누려 애썼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마음은 그에게 스쳐 지나가는 일상처럼 여겨졌다.
그의 무표정한 반응은,
마치 늘 그랬다는 듯 당연해 보였고,
그가 잊은 건 내 말이 아니라,
그 말에 담긴 온도였다.
그때,
우리가 앉은 자리에
서로 다른 계절이 머물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묻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긋난 걸까.
감정을 말하지 않는 건 원래 그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깊이 있는 사람의 조심성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고,
나는 그 침묵을 스스로 사랑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경계를 넘자, 나는 낯선 사람이 되었고
감정을 건넬수록 그는 더 멀어졌다.
그래서 나도, 조금씩 감정을 접었다.
말은 이어졌지만,
진심은 언제나 목 끝에서 흩어졌다.
그게 조율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를 지워내는 일이었다.
나는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끝까지 사랑하고 있었다.
그날도,
무심한 그의 옆에서
나는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내 활발함을 좋아했던 건
자기 안에 없는 무언가를 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다정함과 사교성은,
누군가 앞에서 나를 숨 쉬게 하는 방식이었지만,
그는 그 모습조차
자신의 세계를 침범하는 일로 여겼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불편함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았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을 말하지 않고 통제하려던 그의 방식이었다.
사랑이 저물 땐,
소리 없이 금이 간다.
감정이 닿을수록, 그는 한 걸음씩 물러섰고
이유는, 끝내 말해지지 않았다.
나는 그걸 서툰 표현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배려가 아닌 방어였고,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는 제스처였다.
그가 내 언어의 온도를 외면할수록,
나는 더 천천히, 더 조심스럽게 마음을 풀어내려 했다.
설득이 아니라, 단지 닿기를 바랐다.
알아주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돌아보면,
그 모든 말은 이미
그가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건 이별이 아니었다.
아주 조용한,
돌아갈 수 없는 거리의 시작.
나는 그 시작을
사랑이라 믿으며 오래 머물렀고,
결국엔,
그를 이해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나를 이해받고 싶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