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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마음이 먼저 자리를 떴다

아무 일도 없었다. 말없이, 마음만 떠나가고 있었다.

by 정민


제 2장. 어긋남을 알아차리는 시간


이별이란, 사랑을 해석하던 쪽이 먼저 지치는 일이다.

나는 그 고요를 견디며, 말 없는 감정을 홀로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도 설명을 멈추었다.





2-1. 마음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말을 아끼고, 필요 이상의 표현을 삼가며,

긴 정적조차 불편해하지 않던 사람.


달라진 건, 나였다.

그 고요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마음.

아니, 그 안에 감정을 감춘 채 머무를 수 없게 된 나 자신이었다.


헤어지기 전,

그와의 마지막 기념일이었다.

몇 번의 생일과 몇 계절을 지나왔지만, 이번은 다르게 기억된다.


며칠 전, 모임 자리에서 우연히 들렀던 호텔 뷔페가 꽤 괜찮았다.

그가 양고기를 좋아했기에,

예전 그 자리로 다시 예약했다.


인당 9만 원. 지하철로는 멀었지만,

열차를 타면 갈 수 있는 거리.


시간과 거리도 중요하지 않았다.

생일이니까,

기념일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마음을 다해 준비했다.

애써 웃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잠시라도 예전의 우리로 되돌아가길 바랐다.


뷔페 안의 테이블.

음식은 풍성했지만, 공기는 낯설 만큼 무거웠다.

예전 같았으면 앉자마자 농담이 오갔을 텐데,

그날은 웃음도, 말도 뜸했다.


내가 말을 걸면 그는 짧게 반응했고,

접시는 비워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우리는 적당히 서로의 사진만 찍어주었고,

식사는 조용히 끝났다.


문 닫는 시간은 9시였지만,

나는 8시 반쯤 자리를 정리하자고 했다.

그때부터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언제나 마감 시간까지 자리를 지켰고,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직원의 눈치를 분명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앉아 있었다.

말 없이, 끝까지 자기 기준을 지켰다.


식당을 나선 뒤부터는 대화가 끊겼다.


평소 같았으면 “잘 먹었네”,

“이건 맛있었지?” 정도는 오갔을 터.

그날은 그조차 사라졌다.


“음식 괜찮았지?”

조심스레 건넨 질문에 돌아온 건 단 두 음절.

“그러게.”


그 말은, 벽이었다.

그 짧은 대답으로, 모든 대화는 닫혔다.


말이 꼭 정적보다 나은 건 아니라는 걸,

그 순간 처음 인정하게 되었다.


광명역까지의 길은 길지 않았지만,

공기엔 형언할 수 없는 거리감이 감돌았다.


그와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기억할 만한 장면 하나 남지 않았다.


그는 묵묵했고, 나 역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의 분위기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그 낯익은 공허감이 더 이상 위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광명역에 도착했을 무렵,

그는 아무 말 없이 앞장서 걸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디 가? 담배 피게?”

물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몸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는 끝내 나를 보지 않았다.

하늘을 향한 시선엔 아무 감정도 머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장면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곁에 있었지만, 마음은 훨씬 멀리 있었다.

나는 그를 지켜보다가,

한 발 먼저 역 안으로 들어섰다.


시간이 지나도 그가 따라오지 않자,

‘광명역에 있으니까 들어와’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 옆에 섰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혼자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 마음은, 이미 돌아설 길을 잃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 역시 말을 삼켰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열차에 올랐다.


용산역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차 안의 공기는 오랜 겨울처럼 냉담했다.


2월의 찬바람처럼,

감정도 점점 서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어색한 듯, 가볍게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게 미안함이었는지,

그저 무안함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접촉은

뭔가를 만회하려는 몸짓처럼 느껴졌지만,

그에게도 이유는 있었을 테고,

내 마음은 이미 그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그 정적은, 때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유리창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흐릿하게 겹쳐졌다.

그 흐릿함은, 지금의 감정과 닮아 있었다.


이건 혼자일 때의 외로움이 아니었다.

함께 있으면서도 고립되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외로움은,

이미 오래전부터 스며들고 있었던 것 같다.




불현듯, 예전 생일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케이크를 직접 디자인했고,

손수 쓴 편지와 선물을 건넸다.


매번 편지를 준비했던 나는,

그날도 마음을 눌러 담아 전했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이런 생일은 처음이라며, 나를 안았다.


그의 어깨가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을 진심으로 믿었다.


사랑을 믿는다는 건,

그런 미세한 흔들림에도 마음을 거는 일이니까.


그 기억이 있었기에,

지금의 차가움은 더 또렷했다.


같은 생일인데,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그때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걸까.


가식이었다면 아팠고,

진심이었다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 생일은,

내 마음이 먼저 떠난 날로 남았다.


몸은 나란히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이 관계도 그랬다.


용산역에 도착해 집으로 향하며,

나는 그 하루를 곱씹었다.


그렇게 애썼던 하루가,

아무 장면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연인도, 친구도 아닌

낯선 사람보다도 먼 거리.


이제는,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았다.


마음이 멀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분명히 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어딘가에서 분명히 멀어진다.

나에겐 그날이 그랬다.


다정했던 말투는 사라졌고,

침묵이 더 익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설명하지 않는 마음에 자꾸 부딪혔고,

그 침묵은 더 이상 질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려니 하게 되었다.


그건 그의 세계였고,

나는 그곳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날은,

이별이 스쳐간 날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마음만 먼저 떠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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